한국기독교역사학회(이재근 회장)가 최근 제405회 학술발표회를 온라인 줌으로 개최했다. 이날 먼저, 김일환 교수(서울장신대 학술연구교수)가 ‘1899~1904년 한성감옥서 수감자들의 기독교 입교에 관한 연구: 독립운동과 기독교사회윤리 형성에 끼친 영향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김 교수는 “한성감옥서는 조선시대의 전옥서(典獄署)를 1894년 갑오개혁 시기에 개칭한 것으로, 일명 ‘종로감옥’이라고도 불렸다. 1899년에서 1904년 사이에 한성감옥서에 수감된 사람들 중에서는 독립협회 활동을 비롯한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된 양반 관료 출신들이 상당 수 있었다”며 “박영효 쿠데타 음모사건(고종 양위 음모사건)에 가담한 죄목으로 1899년 1월에 체포 수감된 이승만을 비롯하여, 동일한 혐의로 1899년 11월에 체포된 안국선과 1902년 조선협회 관련 혐의나 유길준 쿠데타 미수사건과 관련하여 이상재, 이원긍(李源兢), 유성준(兪星濬), 홍재기(洪在箕), 김정식(金貞植), 이승인(李承仁) 등이 수감되어 있었다. 이들 외에도 유동근(柳東根), 홍정섭(洪正燮), 양기탁(梁起鐸), 이동녕(李東寧), 신흥우(申興雨), 박용만(朴容萬), 정순만(鄭淳萬), 김린(金麟), 이종일(李種一), 이준(李儁) 남궁억(南宮檍), 조택현(趙宅顯), 김형섭(金亨燮) 등이 정치적 사건과 연루되어 수감 중이었다”고 했다.
이어 “이렇게 국사범(國事犯)으로 수감되어 있는 중에 기독교에 입교(入敎)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승만, 이상재, 이원긍, 김정식, 홍재기, 유성준, 안국선, 이승인 등”이라며 “이들은 수감 중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벙커(D. A. Bunker), 헐버트(H. B. Hulbert), 에비슨(O. R. Avison), 언더우드(H. G. Underwood), 게일(J. S. Gale), 존스(G. H. Jones) 등 선교사들의 도움과 선교활동, 옥중에 개설된 학교, 서적실 등을 통한 영향, 개인적인 신앙 체험 등을 통해서 기독교에 입교하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더불어 “이원긍의 아들 이능화(李能和)가 ‘시위관신사회신교지시(是爲官紳社會信敎之始)’라고 언급한 이들의 옥중 기독교 입교에 대해서는 이미 다양한 연구들이 진행되었다”며 “이승만, 이상재, 안국선, 이준, 유성준, 김정식 등에 대한 인물 연구, YMCA, 교육운동, 기독교민족운동 등과 관련한 연구, 근대 한국정치사, 한국종교사 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선행 연구를 모두 거론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고 했다.
그는 “수감 장소는 1900년 4월 증축을 완료한 중부 서린방의 한성감옥서인 것이 정설이지만, 이상재의 「공소산음」, 「옥중도서대출부」의 관외 대출자 명단, 평리원에서 ‘본원재수’를 언급한 내용 등을 살펴본 결과 한성감옥서와 평리원 감옥(옛 금부옥)에 나눠서 수감되었을 가능성도 고려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옥중 신앙 체험은 기존에 많이 언급되어 온 김정식, 이상재, 이승만, 유성준의 기록 외에 이원긍, 홍재기의 기록, 소설 속에 나타나는 김정식의 신앙 체험 등을 살펴보았다. 특히 「공소산음」에 수록된 이상재, 이원긍, 김정식, 홍재기 등이 성서공회에 보낸 편지에 나타나는 신앙 체험 중에 이원긍과 홍재기의 기록은 현존하는 유일한 기록인데, 이 기록에 의하면 이들의 옥중체험은 급격한 감정적 변화를 동반한 회심 체험 보다는 지성적인 구도자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며 “김정식의 옥중 체험이 「다정다한」이라는 소설로 만들어져 「태극학보」에 수록되어 소개된 것은 당시 일본의 조선 유학생들을 포함하여 젊은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소개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 옥중 입교인들이 연동교회에 출석하게 되는 경위 중에 감리교회에 먼저 출석을 타진했다가 정치인에 대한 선교사들의 거부감 때문에 거부되었다는 내용은 차후 사료 발굴을 통해서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며 “연동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옥중 입교인들의 활동은 교육활동이 두드러졌다는 특징이 있다. 교회 안에 부용회를 설립하고 교육관인 애린당을 건립하는데 앞장서고, 미국 북장로회 서울스테이션이 운영하는 연동여학교, 경신학교의 교육에 참여하고 교과서를 집필하는 것에서 그들의 기독교 교육에 대한 관심을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국민교육회와 황성기독교청년회 교육부를 통해 전개한 교육사업은 교육을 통한 근대시민 육성과 국권회복을 목표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며 “물론 그들은 성리학적 정체성 속에서 기독교를 수용했기에 내재된 성리학적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한계도 있었다. 신분질서의식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고 갈등 속에 1909년 묘동교회를 분립한 것이 그런 사례에 해당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서 두 번째로 ‘Korea Christian College의 설립자 문제 재검토’라는 주제로 발제한 전인수 교수(강서대 신학과)는 “ 한국기독교학원(Korea Christian Institute)으로 출발한 Korea Christian College는 흔히 약자인 KCC로 불린다. KCC는 2015년부터 KC대학교로 불리다가 2022년 4월 19일 강서대학교로 변경되었다”며 “KC대학교는 Korea Christian University의 약자를 기반으로 한 이름이었는데 그 전 교명은 그리스도대학교였다. 물론 이전에도 교명은 몇 번 변경된 적이 있었다”고 했다.
이어 “반면 영어 교명은 처음 Korea Christian Institute였다가 1961년 이후로 KCC로 불렸으며, 1997년 KCU로 변경되었다. 곧 Institute → college → university로 바뀌었지만 영어 교명에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의교회(아카펠라)에 익숙한 KCC를 편의상 강서대학교의 최초 교명으로 사용한다. KCC는 1958년 4월 19일에 설립되었다”며 “학교가 처음 출발한 곳은 서울 용산구 효창동 선교부였는데, 1960년 상도동으로 옮겼다가, 1960년 화곡동에 대학 부지를 구입하고 1962년 대학 본관과 기숙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화곡동 시대를 열었다”고 했다.
이어 “ KCC의 설립자는 최수열(Lewis Haskell Chesshir, 1916~2003)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도대학교 50년사」는 최수열을 KCC를 세운 ‘설립자’로 명기하였다”며 “이런 견해는 전에도, 후에도 크게 논란 없이 유지되었다. 이 때문에 2015년까지 「그리스도대학교 요람」은 최수열을 설립자로, 홀튼을 초대 원장으로 명시하였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 KCC 설립자에 대한 입장이 몇 차례 바뀌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전통적인 관점은 최수열이었으나 2015년 9월 이후 설립재단 KCEF가 명시되고 설립자로는 최수열과 더불어 홀튼이 등장한다. 그리고 2017년 다시 최수열로 회귀했다가 2022년에는 최수열과 홀튼이 공동 설립자로 정리된다. 이런 설립자에 대한 입장 변화는 다음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며 “첫째는 대학 운영의 주도권이 바뀔 때마다 설립자도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설립자 문제가 학문 외적 영향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두 번째는 최수열이 설립자라는 전통적 입장이 학문적으로 충분히 자리 잡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이다. 즉 전통적 입장은 최수열이 설립자라는 근거를 보강하고, 홀튼과 KCEF의 역할을 설명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 설립자를 학문적으로 정리해 보려는 하나의 시도로서, 연구자는 홀튼을 단독 설립자로 상정하거나 KCEF를 설립재단으로 보는 견해는 문제가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며 “특히 홀튼과 KCEF를 지지하는 견해들은 주장만 있을 뿐 학문적 근거를 제시하거나 그 근거를 토대로 한 연구 성과물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 최수열을 단독 설립자로 상정해 왔던 전통적인 관점도 홀튼을 배제함으로써 초기 설립 과정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고 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