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총신대 역사학 교수 김형석 목사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재)대한민국역사와미래 이사장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치러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고 2017년 5월 10일 대통령으로 취임한 문재인은 그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국민주권의 시대’를 선언하고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2018년 8월 15일은 정부 수립 70주년이라고 주장하였다.

촛불혁명으로 국민주권의 시대가 열리고 첫 번째 맞는 광복절입니다. 국민주권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처음 사용한 말이 아닙니다. 100년 전인 1917년 7월, 독립운동가 14인이 상해에서 발표한 ‘대동단결 선언’은 국민주권을 독립운동의 이념으로 천명했습니다.… 국민주권은 임시정부 수립을 통한 대한민국 건국의 이념이 되었고, 오늘 우리는 그 정신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2년 후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내년 8.15는 정부수립 70주년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 19대 대통령 문재인 역시 김대중, 노무현만이 아니라 이승만, 박정희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모든 대통령의 역사 속에 있습니다. - 문재인, <광복절 72주년 경축사> 중에서

역대 대통령의 역사인식⑥ 문재인의 '건국 백년' 전쟁
 ©김형석 교수 제공

여기서 주목되는 발언이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라는 부분이다. 이것은 역대 대통령들이 광복절 기념사에서 하나같이 천명해 온 '1948년 건국'을 부정하면서 2019년에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을 기념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역대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를 보면 '건국 20주년'(1968.8.15, 박정희) '건국 30주년' (1978.8.15, 박정희) '건국 40주년'(1988.8.15, 노태우) '건국 50주년'(1998.8.15, 김대중) '건국 60주년' (2008.8.15, 이명박) 등 10년을 주기로 광복절 경축사에는 반드시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건국을 기산하는 것은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지, 이데올로기 문제나 정치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역대 대통령의 역사인식⑥ 문재인의 '건국 백년' 전쟁
김대중 대통령의 건국 50주년 경축사를 보도한 언론 기사(1998.8.15) ©김형석 교수 제공

이승만 대통령 역시 1958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사에서 "광복 제13주년 정부수립 제10주년 기념일"로 연설하면서 이어진 내용 중에 "우리가 독립된 공화정부를 건설한 지 2년도 다 못되어서 공산 침략자들이 병력을 가지고..."라는 표현을 통해서 정부 수립이 곧 건국임을 나타내고 있다. 더욱이 문재인 정부가 정치적 계승자임을 강조하는 노무현 대통령도 2003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1945년 해방과 1948년의 건국을 선언했다. 그런데 역대 대통령의 한결같은 1948년 건국 시점 기산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대통령만 유독 1919년 임정 수립을 건국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역대 대통령의 역사인식⑥ 문재인의 '건국 백년' 전쟁
국립 서울현충원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방명록에 '건국 백년'을 준비하겠다고 적었다. ©김형석 교수 제공

2018년 '3.1절 기념사'에서도 "새로운 국민주권의 역사가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을 향해 다시 써지기 시작했다"며 '3.1운동으로 인한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임을 강조했다. 문재인의 이러한 역사인식은 남북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은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도보다리 대화'에서 김정은 위원장에게 2019년에 3.1운동100주년기념행사를 남북 공동으로 갖자고 제안해 동의를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9.19 평양 공동선언'에서는 100주년기념행사를 남북이 공동으로 개최하며, 이를 위한 실무적 방안을 협의해 나가기로 문서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기점으로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문재인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공식 석상에서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용어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정확한 내용은 알 수가 없지만,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아마도 문재인과 청와대의 참모들이 근·현대사를 바라보는 남북 간의 역사인식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건국 100주년을 언급했다가 북한 측의 거부감을 인지하면서부터 건국이라는 용어 사용을 의도적으로 기피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뿐 아니라 1948년 9월 9일을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건국일로 지키고 있는 북한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기 때문에, 이후부터는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용어도 생략하고 3.1운동100주년남북공동사업만 거론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문재인이 7월 3일 문화역서울 284(구 서울역사)에서 열린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출범식에서 "4월 27일 저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3.1운동100주년 남북공동기념사업 추진을 논의하고 판문점 선언에 그 취지를 담았다"고 말한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국내에서와 달리 남북공동사업에는 임시정부가 빠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위원장 한완상)의 남북공동사업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으며, 20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을 반인민적인 부르주아 사대주의자로 규정하고, 3.1운동을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계급투쟁에 입각해 김일성 아버지 김형직이 평양에서 주도한 인민봉기라고 주장하는 북한이 남한 정부와 함께 3.1운동100주년을 기념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발표된 「남북 정상회담 합의문」에는 "6.15를 비롯하여 남과 북에 다같이 의의가 있는 날들을 계기로 당국과 국회, 정당, 지방자치단체, 민간단체 등 각계각층이 참가하는 민족공동행사를 적극 추진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지, 3.1운동이나 임시정부 수립과 같은 특정한 역사적 용어는 수록되지 않았다.

역대 대통령의 역사인식⑥ 문재인의 '건국 백년' 전쟁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린 '3.1 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출범식 ©김형석 교수 제공

한편 남북 공동 기념행사가 성사되지 못하고 남한 단독으로 거행된 3.1운동 100주년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이전의 '임시정부 수립이 건국'이라는 표현 대신 '민주공화국의 뿌리인 임시정부'라는 새로운 역사인식을 나타냈다.

우리는 함께 독립을 열망했고 국민주권을 꿈꿨습니다. 3.1독립운동의 함성을 가슴에 간직한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독립운동의 주체이며, 나라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더 많은 사람의 참여를 불러일으켰고 매일같이 만세를 부를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 첫 열매가 민주공화국의 뿌리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정부 헌장 제1조에 3.1독립운동의 뜻을 담아 '민주공화제'를 새겼습니다. 세계 역사상 헌법에 민주공화국을 명시한 첫 사례였습니다. - 문재인, <제100주년 3.1절 기념사> 중에서

이후 2019년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함께 '민주공화국'을 선포한 지 100년이 되었다"고 언급하면서 '건국'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애써 회피했다. '선포'와 '건국'은 전혀 다른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의 '건국 100년'과 관련하여 의미있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마친 다음 날 역사문제연구소와 역사학연구소, 한국역사연구회가 공동으로 <국가 정통론의 동원과 '역사전쟁'의 함정>이라는 제목의 학술회의를 개최한 것이다. 이들이 발표한 「학술회의 취지문」에는 그 이유가 잘 나타나 있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어쩌면 국가주의의 승리의 역사이기도 했다. ...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러한 방식의 역사 만들기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했던 과거 정권에 국한된 문제인지 커다란 의구심을 갖고 있다. 특히 우리는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점으로 '건국 백년'이 운위되는 것에 대해 큰 문제의식을 느낀다. 이는 학계를 포함해 공론장의 충분한 논의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선택의 결과인 것이 분명하다. 또한 현재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이 추진하고 있는 전시 내용 역시 '건국 백년'이라는 구도에 맞춰져 있다면 더 큰 문제이지 않을 수 없다. - 역사문제연구소·역사학연구소·한국역사연구회, <국가 정통론의 동원과 '역사전쟁'의 함정>「학술회의 취지문」(2019.4.12)

문재인 대통령의 '건국 100년'이 정치적 선택의 결과였다는 역사학계의 뼈아픈 지적이자, 그러한 의도를 인지하고도 휩쓸린데 대한 역사학자들의 자기 성찰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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