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국 교수(백석대 실천신학)가 2일 복음과 도시 홈페이지에 ‘몸과 영혼은 인간의 이름이다’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최 교수는 “기독교 신학은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 ‘인간은 몸을 가지고 있다’고 이해하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많은 신학자들이 몸과 영혼의 통전성보다는 플라톤의 이원론에 입각하여 몸에 대한 영혼의 우위성을 강조해 왔다”며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내적 국면이나 정신적 영역이나 영혼과만 관련된다고 이해하고, 몸은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했다.
이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며 “인간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다. 중요한 것은 구약 성경에서 ‘몸’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바사르’는 뼈나 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형태화된 인간 자체”라고 덧붙였다.
그는 “신약 성경에서 몸은 인간의 외적 공간의 의미로 제한되어 이해되기보다는 전인의 의미로 설명되고 있다”며 “로마서 12:1에서는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고 말한다. 여기서 몸은 의심의 여지없이 전인을 뜻한다.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몸은 하나의 실체나 객체로서가 아니라 행동하고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가능성이고, 또한 하나님께 순종하고 불순종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했다.
이어 “‘인간은 몸을 가지고 있다’가 아니라 ‘인간이 몸이다.’ 몸은 인간 자신이다. 몸은 결코 죄악의 발전소나 성령을 거스리는 좌소가 아니”라며 “몸은 하나님의 거룩한 선물이다. 달라스 윌라드는 “인간의 영적인 삶은 언제나 우리의 몸을 사용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이것들 외에 영적인 삶의 다른 도구나 수단이 없다”고 말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몸이 없으면 걸을 수도 눈으로 아름다운 세계를 보며 시를 쓰며 노래할 수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의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코로 냄새를 맡고, 입으로 맛보는 것을 통해서 알게 된다”며 “영적 삶은 몸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은 그의 시를 통해 사람은 ‘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몸 때문에’ 발전한다는 메시지를 남겼다”고 했다.
또 “아프리카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에서의 예배는 생동감이 넘친다. 그들은 몸으로 찬양하고 몸으로 기도한다”며 “몸으로 표현된 그들의 아픔과 기쁨이야말로 진정한 찬양이요 기도이다. 하나님의 사랑도 단지 언어에만 그칠 수 없어 그의 아들에게 몸을 갖게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의 수난과 고통과 부활은 그의 몸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졌다”고 했다.
최 교수는 “성경에서 영혼(네페쉬), 정신(누우스), 혼(프슈케), 영(프뉴마), 몸(소마), 마음(카르디아) 등은 인간의 전체적 인격의 다양한 차원을 말한다”며 “이 용어들은 인간의 다양한 부분(part)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차원(aspect)을 말한다”고 했다.
이어 “통전적 생명체로 창조된 인간은 본질적으로 몸(롬 12:1), 육체(행 2:17), 영혼(시 107:9) 등으로 칭해지고 있다. 이러한 용어들은 인간의 다양한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며 “같은 성경 구절도 때로는 ‘영혼’으로 번역되기도 하고 ‘사람’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KJV에서는 인간을 ‘영혼’으로 NIV에서는 ‘사람’으로 번역하고 있다. 예를 들면,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하게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 107:9, KJV/개역개정). ‘주님께서는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실컷 마시게 하시고 배고픈 사람에게 좋은 음식을 마음껏 먹게 해 주셨습니다’(시 107:9, NIV/새번역). 또한 성경은 인간을 영혼으로 번역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몸(롬 12:1), 육체(행 2:17) 등으로 표현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성경은 인간을 몸과 영혼을 가진 존재라고 설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인간은 다차원적 국면과 인격을 지닌 존재라고 묘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며 “통전적 존재로서 인간의 다차원적인 이름과 국면이 영혼, 영, 마음, 몸, 육체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했다.
이어 “기독교의 ‘영적’(spiritual)이란 개념도 몸과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며 “그리스 사상에서는 영적 개념은 몸과 대비되는 것으로 규정되었지만, 히브리적 성경적 ‘영적’ 개념은 몸과 대비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 안에서 규정되는 용어이다. 하나님의 영은 인간의 다양한 차원인 몸, 영혼, 마음 모두를 ‘영적’이 되게 한다. 영적인 사람은 몸을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고 신령한 몸으로 돌보고 사랑한다.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이다. 영적인 사람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던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관계가 회복된 자를 말하는 것이지 몸을 소외시키거나 몸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자가 아니”라고 덧붙였다.
최 교수는 “몸과 영혼은 서로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다. 몸과 영혼은 유기적 상호관계 안에 있다”며 “이 두 차원은 유기적 관계 안에서 영혼은 몸의 생생한 지향성을 형성하고, 몸은 영혼의 가시적인 실천성을 형성한다. 몸이 없으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실천할 수 없다”고 했다.
이어 “우리의 삶에서 가시적이고 실천적인 삶은 매우 중요하다. 가시적이고 실천적인 삶을 위해 사용된 성경의 개념이 몸”이라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요한 표지인 긍휼, 친절, 겸손, 온유, 인내 사랑(골 3:5~12)도 몸을 통해 구현된다. 우리는 이것을 야고보서에서 볼 수 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 2:15~16). 분명하게 하나님의 계획에서 몸, 특히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몸은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교회는 인간의 영적 필요뿐만 아니라 육체적 필요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돌봄, 육체적으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 건강한 일상생활과 관련된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몸의 진정한 의미는 가시적이고 체현적인 삶을 위한 지향성과 관계된 개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몸은 심리치료와 같은 인간의 내적치유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유진 젠드린은 왜 어떤 심리치료는 효과가 있고, 어떤 것은 전혀 효과가 없는지에 관해 의문을 가졌다. 그는 임상적 연구를 통하여 인간 문제의 핵심이 실제로 어디에 놓여 있는지는 몸이 ‘알며’ 또 사람들이 실제로 변화하면 그 변화가 몸에 기록된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더 많은 실험을 한 후에 인간을 치유하고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몸이 보내는 신호를 읽는 법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며 “젠드린은 심리치료의 성공을 결정짓는 것은 치료자의 기술이 아니라 환자가 행하는 또는 몸으로 말하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거의 예외 없이 치료가 호전된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매우 미묘한 내적 몸의 인식에 초점을 맞추었다. 젠드린은 이 경험을 ‘느낌 감각’ 또는 ‘몸 감각’이라고 칭했다. 그는 이 몸 감각을 사람들을 치료하는 안내자로 활용했다(Eugene Gendlin, Focusing, 10). 젠드린의 경험은 우리의 삶에서 몸에 대한 관심, 특히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읽어내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인간의 몸은 하나님의 선물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가 펼쳐지는 장이다. 기독교 신학이 창조에서 구속까지 이 모든 우주적 과정을 하나님의 행위에 의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몸의 세계와 질서도 하나님의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며 “하나님은 선택적으로 정신만을 통하여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몸을 통하여 온전하게 그 뜻하신 바를 이루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풍성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몸을 통해 그의 뜻을 펼치신다. 하나님은 우리 몸을 통해서도 일하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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