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국 교수(백석대 실천신학)가 11일 복음과 도시 홈페이지에 ‘영혼-몸 이원론은 ‘헬라 복음’이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최 교수는 “영혼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먼저 영혼이란 개념에 대한 바른 이해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이는 무교에서 말하는 귀신의 개념과 성경에서 말하는 귀신의 개념이 완전히 다르듯이, 헬라 사상에서 이해해 온 영혼이란 개념과 히브리 사상과 성경의 영혼의 개념은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한국 무교에서 귀신은 죽은 사람의 혼이 귀신이 되는 것으로 믿지만, 성경에서의 귀신은 하나님을 배반한 악한 영을 말한다. 따라서 무교와 성경이 같은 귀신이란 단어를 사용한다고 하여 같은 의미는 아니”라며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영혼이란 개념도 헬라 사상에서와 성경에서는 다른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헬라 사상에서는 영혼은 몸과 대비되는 실체적 개념으로 이해되지만, 히브리 사상에서는 영혼은 몸과 대비되는 실체가 아니라 인간의 인격적 국면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히브리 사상에 기초한 성경에서 말하는 영혼은 인간의 인격과 정체성을 말해 주는 개념이며 명칭”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헬라 사상에서는 전통적으로 영혼은 몸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해되어 왔다”며 “이러한 이해의 기원은 플라톤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던 고대 그리스 종교였던 오르페우스교였다. 오르페우스교는 영혼은 신적 기원을 갖지만 몸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이해했다. 여기서 영혼과 몸의 이원성이 형성되게 되고, 대립된 실체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오르페우스교의 중요한 표어는 몸은 ‘영혼의 무덤’(soma sema)이었다”고 했다.
그는 “인간의 몸에 대한 그리스 전통의 부정적 이해는 또한 현상적 경험에서 형성되었다.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며 “고대 그리스인의 이원론적 사상은 사상가에 의해서만 형성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처한 삶의 정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형성되었다”고 했다.
이어 “일반적으로 고대 로마인은 생활공간과 환경이 매우 취약했다. 현대인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취약했다”며 “그들은 온 식구가 한 공간을 쓰면서 가축과 동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환경 때문에 그들은 질병에 많이 노출되었다. 그들은 치명적인 질병을 날마다 목격했다. 게다가 현대인처럼 치아를 관리할 수 없었던 고대인은 치아가 빠지면 더 이상 음식물을 씹을 수 없었고, 이는 영양실조와 조기 사망의 원인이 되었다. 고대인은 이러한 환경에서 오는 고통과 사망의 원인은 몸의 연약성과 취약성 때문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들은 몸에 대한 인식이 아름답고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런 환경에서 형성된 몸에 대한 고대인의 부정적인 사유는 초대 그리스도인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왜냐하면 초대 그리스도교 사상은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라며 “초대 그리스도인은 현대 그리스도인보다 몸의 취약성과 부패성뿐만 아니라 심지어 죄악의 통로로 여기기까지 하였다. 초대 그리스도인은 현대 그리스도인보다 취약한 신체를 날마다 생생하게 목격했다. 따라서 몸에 대한 부정적인 사유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또 “삶의 환경이 개선되고 자연재해로 인한 사망이 줄어들면서 인간의 수명이 늘어났다”며 “하지만 고대인이 처한 환경과 철학적 사유에서 형성된 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오랫동안 서구 사상에서 지속되었다”고 했다.
최 교수는 “고대인의 경험과 깊이 관계되어 형성된 고대 그리스 사상은 플라톤의 사상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며 “이렇게 형성된 플라톤의 사상은 기독교 사상 형성에서도 그 힘을 발휘했다. 영혼과 몸의 이원론적 이해는 서구 사상과 기독교 사상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공유되어 왔던 것도 사실이다. 기독교 전통에서 이러한 플라톤적 인간 이해는 상당히 오랫동안 영향을 행사해 왔다”고 했다.
이어 “인간 창조에 대해서 최초로 기술하고 있는 창세기 2:7은 인간은 통전적 또는 전인적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알려준다.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 모양을 지으시고 ‘생기’ 또는 ‘생명의 호흡’(네샤마)을 불어 넣었을 때, 생령(네페쉬 하야, living soul: 영혼, 아담, 사람, 살아 있는 존재)이 되었다”며 “아담(사람)은 전인이다. 아담은 몸과 영혼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전인으로 창조되었다. 통전적 생명체로 창조되었다”고 덧붙였다.
또한 “여기서 히브리적 인간 창조는 헬라적 인간 이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헬라 사상에서는 인간을 영혼과 몸이라는 두 실체의 ‘물리적 결합’ 곧 이원론적 존재로 이해한다”며 “하지만 히브리적 관점은 인간은 ‘화학적(신비적) 변화’ 곧 한 실체로서 다양한 차원을 지닌 통전적인 존재로 창조되었다. 인간은 영혼과 몸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몸으로서 인간이며, 영혼으로서 인간”이라고 했다.
그는 “기독교가 영혼의 개념을 성경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헬라적 개념으로 이해해 온 경향이 있다. KJV 등이 창세기 2:7의 아담(사람)을 ‘생령’(살아 있는 영혼, a living soul)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이는 구약성경 그리스어 역본의 ‘네페쉬’(nephesh, 영혼)의 번역어로, 고대 헬라 그리스어를 반영한 것”이라며 “이러한 영향으로 기독교에서 영혼을 몸과 대비되는 실체로 이해해 온 경향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현대 성경 역본들은 네페쉬(영혼, 아담)를 ‘살아 있는 존재’(a living being)로 번역하였고, 어떤 번역본(NLT)은 ‘그리고 그가 살아 있는 사람’(a living person)이 되었다고 번역하였다”고 했다.
이어 “창세기 2:7에서 하나님의 생기로 창조된 영혼(네페쉬)인 아담을 몸과 대비되는 실체로서 이해해야 하는가 아니면 살아 움직이는 실체인 사람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질문이 될 수 있다”며 “‘네페쉬’라는 용어는 구약성경에 무려 팔백 번이나 등장할 정도로 매우 역동적이고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 단어이다. 구약학자 로슨 스톤(Lawson Stone)은 창세기 2:7의 네페쉬를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이 호흡을 불어 넣으시자 흙더미가 실체로 변하여 살아 있는 네페쉬가 된 것이다. 살아있는 네페쉬라는 용어는 아담이라는 존재의 총체성을 나타낸다. 아담이 네페쉬를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살아 있는 네페쉬다’라고 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성경에 등장하는 네페쉬는 결코 단순하게 이해될 수 없는 용어”라며 “때문에 어떤 성경 구절을 근거로 그 용어를 특정한 인간관을 말하기 위해 사용하게 되면 자칫 단순한 이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구약성경의 네페쉬와 신약성경의 프쉬케란 용어는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단어가 쓰이는 맥락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에서 네페쉬는 몸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는 있지 않다는 것”이라며 “바울이 언급한 육체는 영혼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육체는 몸과 영의 차원 모두를 포괄하는 전인으로서 인간이 성령을 거스르는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고 했다.
아울러 “몸을 영혼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보거나 몸에 대한 영혼의 우위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성경적 복음이 아니라 헬라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기독교 복음은 몸 없이 완성될 수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며 “그리스도인들이 몸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것은 영혼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것만큼이나 비성경적이고 비복음적인 것이다. 몸과 영혼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 기독교 복음은 효과적으로 실행될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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