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호 목사
박진호 목사

창조는 단번에 완벽하게 이뤄진 것입니다. 창세기 1:1 말씀을 보면 태초, 하나님, 천지, 창조 네 단어뿐입니다. 태초가 구체적으로 언제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천지는 무엇인지, 창조는 어떤 방식으로 되었는지 상세한 설명이 아예 없습니다.

굉장히 저돌적이고 일방적인 선언입니다. 원래 히브리 어법과 언어는 회화적이고 묘사적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발생한 사실을 단순하게 그냥 그대로 기록합니다. 추상적 용어들을 동원하여 상징적 암시적으로 심오하게 진술하지 않습니다. 그림에 비유하자면 추상화는 물론 인상파 축에도 들지 않고 아주 사실적입니다.

이 창조 선언에는 종교학자나 인류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원시적 다신론에서 점차 유일신 사상으로 발전되었다는 의미는 아예 없습니다. 세상 민족들마다 전해 내려오는 창조 설화를 모방, 인용, 답습했다는 흔적도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환상이나 상상의 산물인 동화, 전설, 신화 같은 요소들도 전혀 없습니다. 시적인 비유를 동원해서 창조를 미화시키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땅에 실존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창조함으로써 존재케 되었다는 절대적이고 간단한 의미 하나뿐입니다. 하나님 혼자서만 주도했다는 것인데 독선적 일방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당신의 뜻과 계획이 절대적으로 완벽했다는 것입니다. 창조 된 과정은 물론 그전에 그분의 주권부터 그러하기에 이런 단순한 선언적 표현 외에는 창조를 묘사할 방안이 없습니다. 창조를 더 아름답고 풍성하고 상세하게 설명하려드는 것은 오히려 창조의 성격은 물론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훼손시킬 뿐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과 2장에는 하나님이라는 주어만 약 50 군데 등장합니다. 건조하기까지 한 사실적인 문장들 안에 성경의 다른 어떤 장들보다 하나님의 주도적 행동이 가장 많이 드러납니다. 바꿔 말해 창조에는 인간이 기여한 바가 눈곱만큼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창조에 일부라도 기여했다면 가능한 더 근사하게 묘사하려 했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문은 하나님이 직접 그렇게 인간에게 선포하신 말씀인 셈입니다. 인간으로 창조의 이런 선언적인 의미를 깨닫게 해주신 것도 그분이라는 뜻입니다. 인간만이 완전한 창조의 배경에 완전한 절대자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인간의 기원을 창조냐 진화냐고 따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창조를 증거하고 있는 셈입니다. 만약 인간이 진화된 존재라면 진화의 유전자만 있어야 하므로 창조를 인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나 종교의 유무와 상관없이 절대자에 대한 의식이 있고 창조의 가능성도 인정합니다. 거의 모든 종족들의 선조에 대한 설화가 어떤 형태로든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식이지 않습니까?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간되기 전까지는 모든 인간의 유전자 안에는 창조 유전자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은 진화의 유전자란 지금도 인간에게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후천적 교육으로 습득한 생물학적 지식일 뿐입니다.

바꿔 말해 창조와 진화란 둘 중에 합리적으로 여겨지는 하나, 다른 말로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를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겐 창조의 유전자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선택이란 반드시 제반 조건이 동일한 범주에 속한 것들끼리라서 객관적인 비교 평가가 가능해야만 합니다. 상호 대체 가능한 방안 중에 최적의 방안을 고르는 것이 선택입니다.

성격이 전혀 다른 것들끼리는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 내지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컨대 선과 악의 서로 비교되는 대상이 아니라 선택이 개입될 문제가 아닙니다. 선이 악보다 좋다는 것은 누구나 체험으로 혹은 선험적 지식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굳이 선택에 비추어 설명하자면 누구나 당연히 선을 택해야 하는데도 그러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본인이 선하느냐 악하느냐에 따라서 자동적 또는 필연적으로 그쪽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선한 자라면 악을, 정말로 악한 자라면 선을 고를 수는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초등학생은 구구셈밖에 모르니 여러 수학 문제 중에서 필연적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문제만 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창조와 진화가 바로 그런 성격입니다. 이 둘을 도무지 동일한 범주에 넣어 비교할 수 없으며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하나가 옳으면 다른 것은 틀린 것입니다. 바꿔 말해 창조는 하나님께 감사 경배할 마음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선택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설령 둘 중 창조가 더 합리적인 것 같다고 인정해도 하나님을 경배할 마음이 없이 그렇게 하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대로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셨고 지금도 살아서 자기 삶을 주도하고 계신데 어찌 그런 분 앞에 겸손히 엎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창조가 옳다고 하면서도 그분을 경배하지 않으면 종교적 지식인으로서 경건한 시늉만 한 것이며 실질적으로는 진화가 옳다고 믿는 셈입니다.

반대로 진화를 선택하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경배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아니 그럴 마음이 없어서 진화를 선택한 것입니다. 자신은 물질에서 스스로 자기 힘으로 발전된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직 물질로만 내 생애를 풍성하고 화려하게 내가 주관하다가 물질로 끝내면 그만입니다.

바꿔 말해 창조와 진화는 자기가 먼저 옳다고 믿으니까 선택하기에 그 후에 그 선택에 따라서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왕의 본인 믿음에 따라, 말하자면 스스로 본인의 정체성과 자아를 인식한 결과에 따라서 선택도 그렇게 정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더러 본문을 읽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라고 권한들 결코 그대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창조를 믿고 있어야 본문이 본문대로 믿어지는 법이고 그래서 본문은 선언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진화를 믿는 불신자들의 인생은 항상 갈급하고 허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단순히 물질에서 찾아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자기 존재의 출발이 그것이 아닌데도 그것에 매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비유하자면 고아가 친부모가 아닌 다른 사람을 부모라고 착각하거나 자기 부모가 되어 달라고 계속 조르는 꼴입니다. 그 어른이 아무리 성숙하고 그럴싸해 보여도 절대로 친부모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럼 아무래도 평생을 고아인 채로 남아 있게 되는데 불신자의 운명이 바로 그러합니다.

따라서 창조는 절대로 기독교의 첫째 교리로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이 정말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첫 걸음이자 유일한 길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선언을 절대적으로 믿고 온전히 그분께 순종 헌신하지 않으면 인간으로 아무런 행복, 만족, 평강, 자유, 안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정말로 그분이 나를 창조했는데 대체 그분 외에 어디서 그런 것들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친부모만이 자식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십니다. 다른 부모한테 찾아가선 아주 궁핍할 때 끼니만 때울 수 있는 적선은 받을 수 있겠지만 참 사랑은 절대 받을 수 없습니다.

창세기 1:1은 창조주 그분의 속성 때문에 또 그분과 인간간의 관계 때문에 어떤 부연설명도 필요 없습니다. 단순히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에게 엄숙히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너는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다. 그런 자녀로 살라! 그렇지 않으면 기다라는 것은 영원한 허망함이다.”라고 말입니다. 평생 고아로 남아 있지 말라고 절실하게 호소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 땅에 그냥 내버려진 무생물 내지 짐승과 똑같은 신세인지 정말로 곰곰이 생각해보라는 뜻입니다.

2022/4/13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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