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3주년 츠빙글리 종교개혁 기념학술대회(대회장 주도홍 교수)가 지난 22일 오전 10시 남서울교회(화종부 목사)에서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와 2022년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개최됐다. 이날 행사는 줌과 유튜브를 통해 온라인으로 진행됐다.
먼저, 1부 개회예배는 이은선 교수(안양대, 준비위원장)의 사회로 주도홍 교수(백석대, 대회장)의 개회사, 화종부 목사(남서울교회)의 설교, 이신열 교수(고신대)의 기도,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최현범 목사(부산중앙교회)의 축사, 지형은 목사(성락성결교회)의 축도 순서로 진행됐다.
주도홍 교수는 개회사에서 “츠빙글리는 개혁교회의 아버지, 개혁신학의 출발자요, 제2의 종교개혁자이며, 한 세대 후 등장하는 칼빈과 함께 한국 장로교회의 뿌리”라며 “그는 일생 무엇보다 로마교회와 루터교의 잘못된 신학, 특히 성찬 신학에 맞서 싸웠고, 결국 스위스 종교개혁의 선구자가 되었고, 개혁교회의 아버지가 되었다. 츠빙글리 종교개혁의 본 고장 취리히대학교 오피츠 교수가 우리와 함께함은 큰 의미가 있다. 이번 츠빙글리 종교개혁 503주년은 세계적이며, 2년 후 2024년에 있을 505주년 기념대회는 본 고장 취리히에서 한국교회, 스위스 개혁교회, 세계개혁교회가 함께 열게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어 설교를 맡은 화종부 목사는 ‘너 하나님의 사람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6:10~12)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화 목사는 “조국교회의 지난 백년의 역사는 어떤 면에서 분열된 세상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만드는 연합과 일치, 함께함이라기보다는 다툼과 분쟁, 끝없는 자기중심성의 반복이었다. 그 뿌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 일상의 경건에서 본분은 찾고 있다”고 했다.
그는 “진리의 선한 싸움 뿐 만 아니라, 코로나19를 경험하면서 결국 본질과 말씀에 충실하길 원하는 조국 교회를 향한 부름을 이번 학회가 초석이 되어 방향을 제시하고, 방법에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지킴으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도전이 온 조국 교회에 잘 제시되고, 건강하게 세계교회를 섬기는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후 김영한 박사는 축사에서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사상은 스위스 개신교 종교개혁 503주년을 맞이하는 세계교회 및 한국교회에 대하여 하나님 말씀에 입각한 교회개혁(물신주의, 세속주의, 교파분열, 개교회주의, 공공성 상실 혁파 등)에 새로운 착상과 역동성을 부여할 것”이라며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사상이 이 모임을 통해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큰 강이 되어 흘러가기를 축원한다”고 했다.
이어 최현범 목사는 축사에서 “지금 한국교회의 일각에서 보이는 정치화의 모습은 그동안 한국교회가 치우쳐온 개인화 내면화 내세화의 필연적인 결과”라며 “한국교회는 다시금 통전성과 사회성을 갖춘 균형 잡힌 건강한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 점에서 츠빙글리의 신학 연구와 발표가 더욱 이어져서 한국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귀한 모임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2부 발표회에선 유디스 베커 교수(Judith Becker,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가 ‘울리히 츠빙글리와 개혁교회의 역사’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유디스 베커 교수는 “츠빙글리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중요한 종교개혁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네트워크의 다른 개혁자들과 서신을 교환하면서,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켰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상호 영향은 양방향으로 작용했다”며 “츠빙글리는 세상이 아니라 주변 환경과 밀접하고 유익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 다양한 유럽 국가로의 확장은 그의 후계자인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했다.
이어 “불링거는 취리히 신학을 진정한 유럽 신학으로 만들었다. 그는 자주 츠빙글리의 그림자 속에서 가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16세기의 중요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불링거는 츠빙글리가 사망한 후 거의 40년 동안 취리히 교회를 이끌었다”며 “그는 다른 모든 개혁자들보다 훨씬 더 큰(최소한 전승되는 서신으로 판단할 때) 엄청나게 큰 편지 네트워크를 유지했다. 불링거는 종교개혁자, 신학자, 교회를 조직하며, 편지를 쓰는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가로도 활발히 활동했으며 따라서 그의 전임자 츠빙글리의 역할을 항상 반복적으로 강조한 최초의 사람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기존의 네트워크 형성에 추가하여 두 가지 측면이 존재한다. 먼저, 종교 개혁에 관심이 있는 많은 학생들이 취리히에서 공부하고 있었다는 것이며, 둘째로 사람들은 매우 일찍부터 종교개혁자들의 저작들을 모아 출판하기 시작해 츠빙글리의 저작들이 편집되고, 출판되었으며, 그의 편지들 중 일부가 출판되면서 츠빙글리의 신학이 전파됐다”고 했다.
아울러 “불링거에 의해 전임자(츠빙글리)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여 후대로 이어지기 시작해 19세기 말 이 전통은 교회와 신학자들로 인해 강화되었고, 네덜란드 교회의 일부에서는 요하네스 아 라스코(Johannes Lasco)를 창립자로 받아들여 취리히에서는 츠빙글링의 역할이 강조됐다”며 “1834년에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의 저작물인 코퍼스 레포르마토룸(Corpus Reformatorum) 이 출판되기 시작해 츠빙글리의 글이 1904년부터 그 곳에 등장했다. 이것은 신학생과 연구자에게 있어서, 불링거보다 츠빙글리를 연구하는 것이 더 용이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두 번째 발제로는 페터 오피츠 교수(Peter Opitz, 스위스 취리히대)는 ‘1523년 츠빙글리의 논쟁과 하나님 말씀을 듣는 교회의 시작’이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오피츠 교수는 “1523년 취리히 의회가 소집한 두 번의 논쟁 (제1차 논쟁은 1월에, 제2차 논쟁은 10월에 개최)은 대개 역사적 관점에서 고찰되고 있다. 종교-교회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종교개혁을 관철하기 위한 정부의 수단으로서 이해되고 있는데, 물론 잘못된 것은 아니”라며 “그러나 그것이 유일하게 가능하면서도, 사안의 핵심을 관통하는 관점도 아니다. 두 번의 논쟁은 근본적으로 기독교 교회에 대한 개혁적 이해가 근본적으로 논의되면서, 처음으로 실천된 사건이었다”고 했다.
이어 “제1차 취리히 논쟁에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츠빙글리 이해의 결과는 하나님 말씀의 진리에 대한 인간적 판단자가 근본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공의회 혹은 파리, 쾰른, 프라이부르크와 같은 로마신학교 뿐만 아니라 취리히 의회에도 적용된다”며 “이것은 그의 논쟁의 대적자들이 공감할 수 없는 해석학적 생각이었다. 항상 그들은 인간적 판단자 없이 기독교 진리를 다룰 수 없다는 것을 반대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논쟁의 결과는 시장들과 의회들이 츠빙글리가 지금까지 선포한 거룩한 복음과 올바른 하나님의 성경의 선포를 ‘오랫동안 자주 더 나은 가르침을 받을 때까지’ 계속하는 것이다. 모든 설교자들은 그들이 거룩한 복음과 일치하고 참된 하나님의 성경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만을 설교하도록 요청받았다”며 “이후에 이 교사들을 이단자로서 명시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취리히는 성경의 원칙을 기독교의 근거로서 공식적으로 도입한 최초의 도시였다. 의회의 결의와 츠빙글리의 논제들은 종교개혁을 지향하는 진영과 로마-합스부르크 진
영에서 주목을 크게 받았고, 다른 연방지역에 의미 있는 자극을 주었다. 물론 츠빙글리의 하나님 말씀 선포와 이해의 합법화가 새로운 조건 속에서 미래에 진리를 발견하는 것을 위하여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에 대하여, 확정적이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는 “제2차 취리히 논쟁일 발발하 외적인 이유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교회의 미사와 종교적 이미지(성상)들에 대한 비판이 증가했기 때문”이라며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칙과 회집된 지역교회로서 이해하는 츠빙글리의 교회론은 이제 로마-카톨릭 교회의 종교성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두 가지 구체적인 쟁점들을 증명해야 했다”고 했다.
이어 “ 제2차 취리히 논쟁에서 서로 다른 견해가 충돌했지만, 분명히 츠빙글리와 레오 주드 및 그들의 동료들이 상황을 좌우했다”며 “드러났단 차이점들은 성경본문의 적용에 대한 문제들이었다. 우상에 대한 성경본문이 성인숭배와 그리스도 성상에 적용이 되는가에 대한 문제, 그리고 성경 앞에서 성인숭배와 희생제사로서의 미사가 책임질 수 없다는 통찰이 취리히에서 어떻게 실천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 여기서 콘라드 쉬미트와 콘라드 그레벨의 견해가 대립됐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제2차 취리히 논쟁의 첫째 날이 끝나갈 무렵, 의장 세바스티안 호프마이어는 공유된 경험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통찰력의 구체적인 시행은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고 평화롭게’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며 “그것은 츠빙글리로 시작하는 ‘신앙의 대화’에 대한 ‘개혁된’ 이해와 상응하며, 다양한 상황에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결정과 공동의 대답을 위한 논쟁 속에서 다시 새롭게 수용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관점에 의하면, 더 나은 가르침을 유보하는 것을 무시하는 결정적인 ‘사법적’ 결과는 ‘사안’이 누락되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리와 관련된 곳에서, 이 사안은 ‘인간적 재판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공동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울러 “1523년 1월과 10월에 개최된 두 번의 취리히 논쟁은 ‘개혁된’ 논쟁의 문화의 시작으로 이해될 수 있다”며 “중세 후기 기독교와 비교하여 기독교 교회의 본질과 하나님의 진리와의 관계에 대한 획기적인 새로운 이해는 신앙의 대화와 기독교 진리를 모색하는 과정에 대한 새로운 형식을 요구했다. 1월 논쟁의 결과가 이와 같은 논쟁 문화의 정당화였던 반면에, 10월 논쟁은 구체적이면서도 결정해야 할 구체적 질문과 관련한 첫 번째 검증이었다”고 했다.
한편 앞서 강연에서는 ▲주도홍 교수가 ‘츠빙글리와 예전’, ▲이은선 교수가 ‘츠빙글리와 정의’, ▲서창원 교수가 ‘청교도의 예언회와 츠빙글리’, ▲이승구 교수(합신대)가 ‘칼빈과 불링거 신학의 비교’, ▲안인섭 교수(총신대)가 ‘츠빙글리의 국가론’, ▲조병하 교수(백석대)가 ‘츠빙글리와 루터의 성만찬 논쟁에 나타난 그리스도 이해’, ▲이신열 교수가 ‘국가와 가난한 자에 대한 츠빙글리의 이해’, ▲박찬호 교수가 ‘츠빙글리와 재세례파의 관계’, ▲임종구 교수가 ‘츠빙글리와 칼뱅의 성례전 비교’, ▲양신혜 교수(합신대)가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와 한국교회’, ▲우병훈 교수(고신대)가 ‘츠빙글리와 그리스도인의 삶’, ▲류길선 교수(총신대)가 ‘칼빈주의적 관점에서 본 에드워즈의 준비교리’, ▲유정모 교수(횃불트리니티)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에 대한 츠빙글리의 이해’, ▲김지훈 교수(안양대)가 ‘츠빙글리와 네덜란드 칼빈주의’, ▲조용석 교수(안양대)가 ‘츠빙글리와 통일’라는 주제로 각각 발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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