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본인은 어떻게 했는가?
물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도 종말의 시기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전서를 저작했을 당시와 사실상은 동일한 상황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예수님 승천하신 이후로는 주님이 당장 내일이라도 다시 오실 수 있는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요즘 세태가 돌아가는 꼴을 보면 점점 더 임박해져간다는 추측도 감히 해볼 수 있습니다. 상기 말씀을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는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바울도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전제했으니 사실상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는 권면입니다.
그럼에도 반드시 설명 드린 두 가지 사항은 감안해서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재림의 시기를 자기들 당대라고 오해했던 상황에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일차적으로 신자들의 개인 생활보다 재림을 대비하는 공동체에 주어진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바울이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면한 의도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뜻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현실 삶에서 생기는 고난들에 대해서 무조건 감사하라는 의미는 아니며 의지적으로 사고의 패러다임을 바꿔서라도 감사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예 없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시기를 아무로 모르므로 신자는 언제든 오실 수 있다는 종말관을 갖고 매일을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의 참 뜻은 매일 매일이 마지막 날이라고 여기고 주님 뜻에 순종하고 있다면 범사에 감사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성도들끼리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 개인의 현실적 고난에도 항상 감사할 수 있다면 가장 바람직할 것입니다. 실제로 이 권면을 한 바울은 고난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우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라고 자신의 죄에 대해 아주 괴로워했습니다. 이 말씀이 구원 전과 후 즉, 칭의와 성화 어디에 해당되는지 신학적으로 설왕설래가 있으나 저는 바울이 예수 믿은 후의 상황이라고 해석합니다. 구원 후에도 죄에 수시로 넘어지니까 어느 쪽으로 적용해도 상관없으며 지금 논의하려는 주제가 아닙니다. 죄는 반드시 부정적 파괴적 결과가 따라오니까 고난에 해당되는데 바울이 이런 실토를 했다는 것은 그 고난을 감사했을 리 없다는 뜻입니다.
그는 또 치명적인 병이 있어서 세 번이나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고후12:7-8) 일상적 고난인 질병으로 너무 고통스러워 기도했는데도 하나님은 응답해주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그가 사역을 하면서 겪은 환난은 예수님 다음으로 최고로 극심했습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는 등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 모든 과정에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만은 절대로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의 믿음의 선진들이 순전한 믿음으로 어떤 죄도 짓지 않고 아무런 영적 갈등도 없이 주님께 완벽하게 순종 충성했다고 오해해선 안 됩니다. 그럼 그들을 예수님과 동일한 수준으로 격상시키는 꼴이 됩니다. 그들 모두가 우리와 성정이 똑같고 죄로 찌든 본성이 남아있는 연약한 인간들이었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과 상황에 여전히 죄 중에 있는 나를 대입시켜서 나라면 과연 어떻게 했을지 깊이 묵상해봐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마저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기에 항상 기뻐하거나 범사에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주님은 공사역 중에 종종 크게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화를 내고 저주했습니다. 예수님도 이럴진대 겨우 우리가 감히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또 그럴 자신이 있다고 여긴다면 너무나 큰 교만이자 자신의 종교적 의를 자랑하는 죄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지 말라거나 범사에 자기감정에 따라 멋대로 화를 내고 의심 불평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런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저자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도로 저작했는지 알기 위해 문맥상의 의미부터 먼저 살펴본 것입니다.
문장에서 정확한 의미
이제 신자들이 성경을 읽을 때 범하는 두 번째 잘못인 문장 자체의 뜻도 잘 모른다는 차원을 따져볼 차례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에는 한 단어가 생략되어 있음을 거의 모든 신자들이 모르거나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나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에게”입니다.
영어번역을 보면 원문의 의미를 더 정확히 알 수 있는데 “in everything give thanks”라고 합니다. 영어는 목적어가 필요한 타동사인 “주어라(give)”로 표현했습니다. 그 동사에 걸리는 직접목적어는 감사이니까 우리말로 감사를 주라고 번역됩니다. 그럼 감사를 받는 대상인 간접 목적어가 생략된 셈인데 신자가 범사에 감사를 바칠 대상은 당연히 하나님뿐입니다. 모든 선한 것은 오직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에게서만 옵니다. 직역하면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려라”가 됩니다.
우리말로 ‘범사에’는 목적어로도 사용되지만 영어의 in everything은 감사를 해야 할 부대 상황 내지 조건을 뜻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와 무슨 일을 하고 있어도 하나님에게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이 이 우리말 문장 하나만 따로 떼서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니까 문제 고난 불행 등등 그런 일 자체에 감사하려 듭니다. ‘범사에’ 정확하게는 ‘범사에서’ 감사해야하는데 ‘범사를’ 감사하라는 뜻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컵에 물이 아직 반이나 남았다고 긍정적 사고로 바꾸어서 감사하라고 가르칩니다. 이는 물이 반이나 남은 그 사실을 감사하는 것이지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고로 잘 봐주어야 그렇게 생각을 바꾼 후라야 그렇게 해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그렇게 생각을 바꾸지 못하면 고난 중에는 하나님에게 감사하지 못하게 됩니다. 범사가 아니라 생각을 바꾸는 것이 감사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이 됩니다. 거기다 성령의 역사는 전혀 개입되지 않고 인간의 적극적 의지로만 행한 인간의 행위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긍정적 사고로 바꿔서 감사하면 하나님이 범사를 긍정적인 결과로 바꿔준다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이 또한 감사라는 인간 행위가 하나님께 복을 받는 조건이 되고 또 그래야만 감사할 수 있는 상황으로 바뀝니다. 본문은 감사할 수 있는 상황과 조건은 범사라고 한정했지 다른 어떤 것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어떤 방식의 조건과 상황을 허락해도 감사하라는 반응만 요구했습니다. 그분은 신자의 선행은 물론 악행을 때로는 초월하고 때로는 아우르며 당신의 뜻을 오직 당신의 주권에 따라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너무나 연약하고 죄의 본성이 살아 있는 존재인지라 문제, 불행, 재앙, 고난이 닥치면 당장에 괴롭고 힘듭니다. 생각을 바꿔 먹으려 열심히 노력해도 진정한 감사가 그 모든 경우에 가능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시편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았습니까? (계속)
2021/12/5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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