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훈 교수(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원장)가 25일 오후 온라인으로 진행된 제18회 ‘창조론 오픈포럼’에서 ‘20세기 근본주의의 등장과 창조과학의 부흥’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양 교수는 “19세기 말엽부터 진화론은 신학과 복음의 영역까지 광범위하게 침투하였으나 어디까지나 이것은 전문 학자들의 영역에 국한되었다”며 “19세기 이후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은 진화론 진영에 합류했지만 창조론자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19세기 말까지도 일반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믿었고 지금도 그렇다”고 했다.
이어 “19세기 창조론의 최종 주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구이요(Arnold Guyot)와 도손(John William Dawson) 등은 진행적 창조론 입장을 취하면서 창조의 과정에 있어서 초자연적인 간섭을 극소화하고 자연법칙의 작용을 극대화했다”며 “19세기 미국의 많은 대학과 신학교에서도 진행적 창조론이 널리 퍼졌다. 그러나 진화론이 널리 퍼지면서, 또한 엄격한 문자적 창조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줄어들면서 개인들을 중심으로 진화론에 대한 경계심도 아울러 커지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20세기 반진화론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는 “20세기에 중요한 창조론과 진화론 논쟁으로는 ‘스콥스 재판(Scopes Trial)’이 있다”며 “1925년 5월 25일 미국 테네시 주 의회에서 인간 진화 교육 금지법(흔히 The Butler Act라고 부르는)을 통과시키는데 진화론자 스콥스(John Thomas Scopes, 1900~1970)는 미국시민자유연맹(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의 지원을 받아 일부러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진화를 가르쳤고 이로 인해 기소된 사건”이라고 했다.
이어 “판사는 비록 진화론이 맞다고 해도 스콥스는 주법을 어긴 것이기에 스콥스에게 10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했다”며 “그러나 외형적으로는 창조론자들의 승리였지만 언론들은 모두 진화론자들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여론전에서는 패배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창조과학운동은 20세기 후반 개신교 진영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근본주의 운동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며 “창조과학운동은 미국을 진원지로 하여 호주, 한국, 캐나다, 일본, 러시아 등 몇몇 나라들에 국한된 운동이었지만 다른 여러 학문 운동이나 신학 운동들과는 달리 유난히 선명성이 강하고 전투적인 대중과학 운동”이라고 했다.
양 교수는 “창조과학은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미국 남부에서 시작되어 호주, 캐나다, 일본, 러시아 등으로 확산되었고, 이후에는 한국까지 확산되었다”며 “그리고 창조과학은 대중과학운동으로 정치계와 교육계 등에 영향을 미쳤고, 세속언론이 조명했다”고 했다.
그는 “창조과학의 신학적 정체성을 보면 기계적 영감설, 성경의 문자적 해석, 이원론적 세계관 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또 “창조과학의 과학적 정체성을 보면 먼저, 젊은 지구론을 주장한다”며 “방사능 연대를 부정하고, 탄소연대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북극의 아이스 코어 연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천체까지 거리 측정을 부정하며, 가변 광속을 주장한다”고 했다.
이어 “둘째로 단일 격변설(노아홍수설)을 주장한다. 젊은 지구론과는 동전의 앞 뒤면과 같은 주장이며, 지질시대(지질 주상도)를 부정한다”며 “고생대부터 신생대 홍적세까지 지층이 1년 미만의 노아홍수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며, 그랜드 캐니언 퇴적암, 요세미티 화강암, 컬럼비아 계곡의 현무암도 노아의 홍수 때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고 덧붙였다.
양 교수는 “루터란 미주리총회(Missouri Synod) 목사인 바이런 넬슨(Byron Christopher Nelson, 1893~1972)이 「그 종류대로」(The Deluge Story in Stone, 1931), 「돌에 새겨진 홍수 이야기」(The Deluge Story in Stone, 1931)라는 저서를 남겼고, 이것이 한국창조과학회 창립 당시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그는 “인디애나주 근본주의 신학교인 그레이스 신학교(Grace Theological Seminary)의 구약학자 존 위트콤(John C. Whitcomb, Jr., 1924~2020)과 토목공학자 모리스(Henry Madison Morris, 1918~2006)가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준 프라이스의 책에 신학적, 그리고 유사과학적 설명을 추가해서 「창세기 대홍수」라는 저서를 발표했다”고 했다.
이어 “「창세기 대홍수」의 성공으로 창조과학협회(Creation Research Society)와 창조과학연구소(The Institute of Creation Research)가 설립되었다”며 “오래지 않아 창조과학 운동은 미국을 벗어나 호주, 한국, 캐나다, 일본, 러시아 등지로 수출되어 창조과학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으며, 화이트의 환상이 개신교 진영을 통해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고 덧붙였다.
양 교수는 “젊은 지구론(노아 홍수)으로 대변되는 창조과학은 신학적으로는 독특한, 그러면서도 치우친 창세기 해석으로 볼 수 있다”며 “그러나 창조과학의 문자적 성경해석은 신앙고백이지 연구 대상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