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성도들
정동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성도들

당시 우리의 정치적, 사회적 여건과 기대 속에 들어온 기독교, 특히 감리교회는 급진적 개화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이 땅에 들어오면서 복음을 양반, 지배 계급인들에게 보다는 하류층, 민중 속에 깊이 침투시켰다. 동시에 복음선교를 통하여 개화운동에 앞장서 구한말과 일제 치하의 우리 민족사에 큰 족적을 남겨놓았다.

실제로 감리교회는 이 땅에 들어오면서 먼저 교회를 세우기 전에 배재학당을 비롯한 이화학당과 정동병원을 세워 우리 젊은이들에게 신지식(新知識)을 가르쳤고, 또한 그리스도를 전하기 전에 먼저 병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질병을 고쳐 주었던 것이다.

배재학당 건물
배재학당 건물

기독교 복음은 위정척사파와 동도서기파 등의 양반계층에는 기득권에 도전하는 위험물로 간주되었으나, 오랜 악정과 봉건적 구습의 멍에에 시달린 민중에게는 그야말로 해방의 복음이요, 희망의 새 출발이요, 봉건적 질곡으로부터의 출애굽이었다. 독립신문은 이와 같은 개화(開化)의 기관으로 ‘교회(敎會)와 학교(學校)와 신문(新聞)’을 지적했다.

“까닭에 개명한 나라에서는 이 폐단을 막기 위하여 사람들을 교육하는 기관이 세 가지니 교회당(敎會堂)과 학교(學校)와 신문(新聞)이라.”1)

독립신문 초판
독립신문 초판

당시 감리교회는 위에서 말하는 삼대 기관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이른바 배재학당과 정동교회, 그리고 최초의 교회신문인 「조선 그리스도인의 회보」이다. 이 감리교의 신문은 삼문출판사(Trilingual Press)에서 출판되었다. 이 신문에서도 개화를 선교의 과제로 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교회는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하는 도(道)라. 조선 인민이 만약 진심으로 우리 도(道)를 봉행하면, 위로는 대 군주 폐하의 명령을 순종할 것이요, 아래로는 서로 사랑하기를 간격이 없이 할 터인즉, 나라에 무슨 염려가 있으리요. 그런즉 교회를 위하여 인민에게 전도하는 것이 아니요, 인민을 위하여 교회를 각처에 설립하는 것이니, 제물포 교회와 같이 다른 곳에도 차차 우리 교회가 흥왕하여서, 조선이 속히 개화에 진보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노라.”2)

이로부터 2년 후인 1899년, 이 신문은 개화와 교육, 그리고 선교가 하나임을 강조하여 배재학당이 개화의 선봉임을 암시한다.

“그런즉 개화하는 데는 인재를 교육하는 것이 긴요한 일이요, 교육하는 데는 하나님의 도를 흥왕하게 하는 것이 긴요한 일로 우리는 아노라.”3) <계속>

[미주]
1) 독립신문, 4권 43호 (1899. 3.1)
2)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 18호, 1897. 6. 2.
3) 대한 그리스도인 회보, 3권 15호, 1899. 4. 12.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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