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예배 드릴 때, 찬양 중에 손뼉을 친다거나, 일어서서 손을 든다거나, 또는 춤을 추고 큰 소리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할렐루야’나 ‘아멘’으로 소리 높여 고백하는 이 모든 행위는 전통 교회의 예전이 아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저희를 이끌어 주소서”나 “하나님을 예배 가운데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또는 “찬양 가운데 임하시는 주님께 영광 돌립니다.”라는 인도자의 멘트나 예배자의 고백은 전통 교회의 예식과는 거리가 멀다. 이것은 현대 예배 찬양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교회의 예배와 찬양은 피아노 반주에 맞춰 찬송가를 부르며, 찬양대(성가대)의 4부 코랄이 있을 뿐이다. 찬양 중에 박수 치거나 소리를 내는 것도 경건치 않다고 생각하며, 설교가 예배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현재 이렇게 예배 드리는 한국의 교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교회는 피아노 이외의 전자 건반과 전기 기타 등 플러그(Plug) 악기에 박수를 치며 찬양 인도자의 인도에 따라 힘차고 기쁘게 찬양을 부른다.
이 같이 한국 교회 예배 찬양의 대부분은 자의반 타의반 현대 찬양에 영향을 깊게 받고 있다. 그리고 마라나타 음악이나 빈야드 찬양을 포함한 현대 예배 인도자와 단체인 힐송이나 패션, 매트 레드먼, 타미 워커, 폴 발로쉬, 달린 첵, 크리스 탐린 등의 곡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매주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예배와 찬양 방식만 고집하기보다는 열린 마음으로 현대 찬양의 역사와 흐름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지금의 각 교회의 예배 공동체뿐 아니라 다음세대의 예배와 찬양을 준비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 방식들이 우리가 가진 예배의 성경적 가치와 본질을 흔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 예배의 시작은 1960년대 후반 갈보리채플의 척 스미스 목사로부터 시작된 ‘예수 운동’과 ‘마라나타 음악’이다. 이 두 가지의 매개체는 당시 유행하던 록 기반의 ‘현대 음악(Contemporary Music)’으로 당시 젊은이들의 갈망과 하나가 되어 현대 예배 운동을 촉발시켰다.
현대 예배와 찬양은 지금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사실, 이런 찬양과 예배가 정착된 지는 수십 년이 채 되지 않는다. 이 놀라운 발전을 일으킨 원동력 중 하나는 하나님을 능동적으로 찬양하는 행위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에 바탕을 둔 ‘임재 신학(The Theology of Presence)’이다. ‘임재 신학’을 연결한 중요한 말씀은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시 22:3)이며, ‘계시는 것’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의 찬양 가운데 계시는 것’으로 ‘살고 계시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가 어떻게 해석되느냐에 따라 다른 해석도 가능하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찬양 위에, 마치 ‘보좌 위의 왕처럼, 왕좌에 앉아 계시는 것’을 뜻한다. 둘 중 어느 해석이든, 이 말씀은 찬양을 하나님의 임재와 연결시키는 말씀이다.
이 ‘임재 신학’은 초기 오순절 신학에서 약간 언급되기는 했지만, 레그 레이젤(Reg Layzell) 목사가 1946년 1월에 이 신학을 구체적으로 발전시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레이젤은 목사가 되기 전, 캐나다 동부에 위치한 큰 도시인 토론토에 거주하던 은퇴한 사업가였는데, 어느 날 캐나다 서부의 브리티시 콜롬비아에 위치한 밴쿠버에서 몇 군데 강의 요청을 받았다.
레이젤이 캐나다 서부로 갔을 때, 첫 번째 방문한 교회에서는 세미나에 대한 반응이 없었다. 사람들과의 만남은 평이했고, 하나님께서는 움직이지 않으셨고, 사람들의 마음은 차가운 느낌이었다. 걱정이 되기 시작한 레이젤은, 브리티시 콜롬비아 방문 첫째 주의 중간 즈음 하루 금식을 하고, 종일 기도하며 시간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던 중,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말씀 한 구절을 주셨다. 시편 22:3이었다. 레이젤은 그 말씀을 마음에 품고, 교회 건물 주변을 걸어 다니며, 그날 하루 동안 하나님을 찬양하며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날 저녁의 집회에서 작은 부흥이 일어났는데, 레이젤은 하나님께서 이 교회가 예배 가운데 추구해야 할 것을 알려주셨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레이젤이 그의 신학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신학의 초석이 된 두 가지 말씀은 시편 22:3과 히브리서 13:15 말씀이다. 레이젤은 시편 22:3 말씀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겠다.’는 긍정적인 약속으로서 이 말씀을 해석했다. 그리고 히브리서 13:15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말씀을 레이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이 어떻든지, 우리가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건 아니건 하나님을 능동적으로 찬양하라는 명령으로 해석했다. 그리하여, 레이젤은 이제 우리의 마음에 있는 생각들을 찬양을 통해 하나님과 연결할 수 있으며, 찬양에는 분명한 성경적 약속과 더불어 성경적인 명령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레이젤이 이 신학을 정립하며 강조했던 중요한 점이 있었는데, 첫째는 오순절의 재해석이다. 레이젤은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신 후 사도들이 그저 예루살렘에서 가만히 앉아 기다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능동적으로 찬양하며 보냈다는 데에 주목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순종적으로 반응하였기 때문에, 오순절에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신 것이라 해석했다.
둘째, 레이젤은 이것을 자율적인 것, 즉 인간의 자유 의지, 즉 우리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선택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이름을 높이고자할 때 그 순종을 귀히 여기신다고 생각했다.
셋째, 레이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영적 무기라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에 하나님께서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찬양하면, 하나님은 그 곳에 임재하고 활동하실 것이고 그러므로, 찬양은 교회의 영적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넷째, 레이젤은 찬양이 단순히 눈먼 복종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기뻐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찬양에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찬양은 단순히 교회가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가 아니라, 교회가 당연히 능동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섯째, 레이젤은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 부흥을 가져다준다고 믿었으며, 우리의 찬양 가운데 계속적으로 하나님께서 거하시므로 교회가 부흥을 유지하고 계속해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찬양 운동’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발전하기 시작해 침례교단, 감리교단, 루터교단, 성공회, 심지어 로마 가톨릭까지 성령을 깊게 경험하던 ‘은사 쇄신 운동’과 맞물렸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임재 신학’과 더불어 현대 예배 찬양이 신학적으로 정립해 나가는 데에 있어 중요한 개념은 1960년대를 거쳐 1970년대 발전했던 ‘모세의 장막(Tabernacle of Moses)’과 ‘다윗의 장막(Tabernacle of David)’이다. ‘다윗의 장막’ 개념은 ‘다윗의 장막’을 복원하는 성경적 기초로부터 시작됐으며, 아모스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9:11-12). 둘째는 예루살렘 공회와 이방인을 교회에 받아들이게 된 것에 관한 사도행전 15장 말씀으로 아모스 9장의 내용이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행 15:16)
‘다윗의 장막을 복원한다.’는 말씀은 여러 가지를 의미했는데. 제사장과 다윗의 장막에 있는 모든 제사장들이 음악가들로, 그 곳에서 드려진 제사가 ‘찬양의 제사’지, 동물을 바친 피를 흘리는 제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들 제사장과 같은 음악가, 혹은 음악 제사장들은 다윗의 장막에서 계속해 찬양과 경배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팀을 이뤄 섬길 수 있었다.
다윗의 장막은 우리가 모세의 장막에서 볼 수 있듯 분리된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24시간, 일주일, 7일 내내 예배를 올려 드리는 음악 제사장들과 함께 존재하는 하나의 공간이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려면 계속해서 새 노래를 쓰고 만들어야했다. 이와 같은 ‘새 노래’들은 ‘시편’ 혹은 ‘시편 찬송’이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우리에게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다윗의 관심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써, 언약궤 위에 있는 두 그룹의 펼친 날개 사이에 머물던 파란 불꽃에 있었다. 그 불꽃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했다. 하나님의 분명한 임재가 있는 곳에는 그 어디서나 승리와 능력과 축복이 있었으며, 하나님은 임재를 사모하는 다윗의 마음에 깊이 감동하셨다. 다윗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무엇인가를 사로잡은 자였으며,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다윗의 열정, 그 열정이 사람들 사이에 충만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신 것이다.
다윗의 장막은 하나님께서 인간들과 만나셨던 그 감격과 추억의 장소였으며, 인간과의 만남을 귀중하게 생각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과의 만남을 원하듯, 하나님은 자녀들인 우리들과의 만남을 매우 원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또 한 가지는 ‘모세의 장막’ 개념인데, 예배 찬양에 대한 책을 많이 저술한 저드슨 콘월(Judson Cornwall, 1924-2005)도 ‘예배와 찬양’의 모델로 중요하게 생각했다. 콘월은 장막 내의 특정 공간, 예를 들면 궁정이나, 문이나, 입구와 같은 곳, 혹은 성소나 지성소 등에 관심을 가졌다. 이와 같은 신학은 예를 들면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고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는” 시편 말씀 등과 연결 짓는다. 모세의 장막은 건축적인 측면에 많이 기반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사람들은 감사함으로부터 찬양, 그리고 예배로 이어져 결과적으로 그 예배를 지성소에서 드리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정리하면 감사에서 찬양으로 진행이 되며, 찬양이 예배로 진행이 되어, 예배는 결국 지성소에서 행해진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모세의 장막에서 행해진 동물 희생 제사와도 연관이 있기 때문에, 갈보리와 예수님의 피 흘리심, 그리고 희생을 성전과 연관시키며,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있었기 때문이라 가르친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개념의 예배에 대한 신학적 중요한 두 기둥인 ‘다윗의 장막’과 ‘모세의 장막’은 사실 서로 배치되는 개념이 아니다. 1960년과 1970년대에 주류였던 두 신학은 매우 중요한 변화를 불러 일으켰는데, 특히 이후 굉장히 흔하게 행해지는 예배 방식의 초석이 되었다.
레이젤이 주창했던 찬양의 ‘하나님의 임재’ 개념은 1940년대와 1950년대 부흥에 참여한 사람들을 비롯해 60년대 초반까지는 처음 찬양만을 강조했다. 이 때에는 찬양이 노래의 형태든, 말의 형태든 찬양을 길게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임하신다고 사람들이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를 따르는 많은 교회들 중에서, 예배당에 모이기 전에, 깊이 헌신된 예배자들이 모여 각자 감사한 것과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의 감사를 30-45분간 서로 이야기했다. 이 모임의 공간은 오랜 시간 동안 하나님에 대한 찬미로 가득했다. 긴 시간이 지난 후, 사람들은 예배당으로 들어가 찬양을 시작했는데, 특별히 엄격한 순서보다는 자유롭고 능동적으로 행해져 언제든 은혜가 임할 수 있는 기대와 여지가 있었으며 매 주일마다 그 형태가 바뀌었다.
이후 ‘모세의 장막’과 ‘다윗의 장막’이라는 두 장막에 기반한 신학이 점점 힘을 얻기 시작한 1960년, 70년대, 80년대를 거치며 점점 찬양의 형태가 정형화되어갔다. 정형화된 찬양은 여러 특성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찬양을 정의하는 히브리어 단어 7개를 중심으로 찬양을 분류하기도 했다. 한편 ‘다윗의 장막’을 기반으로 된 가르침에서 모든 제사장이 음악가였다는 부분에 기반해, 음악적이고 노래하는 형태의 찬양을 오랫동안 하게 되었는데, 주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찬양을 인도했다. 시편 104편에 기초한 모형과 같이, 시간과 찬양의 진행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이를테면 사용되는 노래의 종류를 바꾼다든지, 다른 방식의 찬양법을 사용한다든지 여러 가지 찬양의 모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음악가들은 단순히 노래를 이끄는 사람이 아닌 ‘예배 인도자’가 되기 시작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예배 인도자(Worship Leader)”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으로, 이는 두 ‘장막론’의 예배 신학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단어다. 그에 따라 예배 인도자가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끄는 일이 되었으며, 모세의 장막의 ‘건축적’인 배경이 기초가 되었다.
이후 ‘찬양(Praise)’과 ‘경배(Worship)’의 분명한 구분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경배는 “교회의 예배하는 사람들, 즉 예배자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나서 하는 것”으로 정의되었다.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계속 진화해온 예배 신학의 마지막 발전 과정으로 성경적 예배 유형을 강조하기 시작했는데, 다윗과 시편이 주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자면, 찬양 중 손을 드는 행동에 대해서도 매우 많이 강조가 되었는데, 이는 시편에 수많은 예제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위의 언급한 예배 찬양과 관련된 신학들은 하나의 형태로, 혹은 두 가지 합친 형태로 융합하며 교회와 예배 공동체에 매우 빠르고 넓게 퍼졌나갔다. 1980년대까지, 이와 같은 신학과 더불어 이와 같은 예배 방식은 세계 곳곳에 퍼져 현대 예배와 찬양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가진수(월드미션대학교 예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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