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대 이성호 교수가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대해 상당부분 왜곡이 있다며 도식화된 틀을 넘어서 균형적인 관점에서 인간 이승만을 평가하는 글을 올려 눈길을 끌었다.
이 교수는 최근 '이승만과 미국' 그리고 '이승만의 공과'이란 제목의 글을 연달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리면서 이승만에 대한 올바른 평가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먼저 '이승만과 미국'이란 제목의 글에서 그는 "한국 현대사를 논할 때 이승만을 제외하고 논할 수 없을 것이다.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미국과의 관계를 보았을 때 이승만은 아주 독특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이승만은 친미와 반미와 같은 개념으로 규정되기가 어려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승만을 연구를 하면 친미/반미 도식이 얼마나 유치한 개념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당수의 연구서에는 이와 같은 도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역사라는 것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 교수는 "물론 이승만이 친미적인 경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부수립 전까지다. 미국의 도움이 없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 이승만은 미국 말을 듣지 않는다. 여러 가지 부분이 있었지만 북진통일론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이승만과 미국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승만이 반미로 돌아선 것도 아니다. 이승만은 미국의 약점을 철저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미국이 절대로 남한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이 약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으며 미국의 심기를 건드릴 정도였다. 심지어 이승만은 미국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조치까지 시행하였으니 휴전협정을 저지하기 위해서 미국의 승인없이 반공포로를 석방해 버린 것이었다"고 이 교수는 덧붙였다.
이 교수는 그러면서 "이와 같은 벼랑 끝 전술에 미국도 화가 있는 대로 났고 심지어 미국 방첩대(CIA 전신)를 통하여 이승만을 암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아무리 자신의 정책에 도전한다고 하더라도 일국의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은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한국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잘 보여 준다. 어쨌든 이승만은 미국의 약점을 이용하여 반공포로를 석방하였는데, 이것은 미국에는 엄청난 부담을 주는 행위였지만 포로들에게는 구원의 선물이었다"고 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적어도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은 친미도 아니고 반미도 아니고 용미주의자에 가까운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그러면서 "아쉬운 것은 이승만을 따르는 친구들에게 이런 기개가 잘 안 보인다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또 이어서 올린 '이승만의 공과'란 제목의 글에서 이 교수는 "어떤 중요한 인물을 역사적으로 평가할 때에는 그 사람의 직무를 가지고 평가해야 한다. 어묵 잘 먹으면 좋은 동네 아저씨는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좋은 대통령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도 많이 한다면 좋은 신자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좋은 대통령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본적 이해가 안 된 교인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교회와 국가를 구분하지 못하면 항상 이런 현상이 생긴다"라고 운을 뗐다.
이 교수는 이어 "남한 만의 새 단독 정부 수립 이후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이 엄청나게 많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 친일청산 2) 통일 3) 경제(토지개혁) 이 모든 것 중에 쉬운 것이 하나도 없었다.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국론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대로 수행하기 힘들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친일청산은 이승만의 정치적 기반이 친일파였기 때문에 아예 하려는 의지가 없었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무산시키고 말았다. 대표적인 예가 반민특위를 해산시킨 것이다.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것은 아직도 우리에게 짐이 되고 있다. 이점에서 그는 부도덕한 대통령이었다. 통일의 경우, 의지는 매우 강했으나 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었다. 이승만은 처음부터 퇴임할 때까지 북진통일을 외쳤다. 하지만 이를 위해 그가 실제로 한 것은 거의 없었다. 이점에서 그는 무능력한 대통령이었다"고 했다.
경제문제는 앞의 두 문제와 조금 달랐다고도 했다. 이 교수는 "의지도 있었고 능력은 없었으나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바로 이 일을 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발탁한 것이다. 지주제는 수천 년을 내려온 한국의 제도이다. 한국이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가기 위해서 토지개혁은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이 개혁이 엄청난 저항을 불러올 것은 뻔한 일이었다. 이승만은 이 일을 좌파 지도자였던 조봉암에게 맡겼다. 이것은 이승만의 초대 내각 인사 중에서 가장 이해되지 않는 인사였다. 조봉암도 처음에는 고사하였으나 이승만의 의지가 확고한 것을 알고 수락했다"고 전했다.
또 "새로 개혁된 농지법에 따라 지주는 일정 이상의 땅을 무조건 정부에 팔아야 했다. 오늘날로 치면 집 3채 이상 가진 자는 무조건 다 팔아야 하는 것과 유사하다. 정부는 그것을 경작하는 농민에게 5년간 할부로 팔았다. 오늘날 이런 정책을 내면 온 국민이 난리가 날 것이다. 물론 그 당시도 지주들의 저항이 엄청났다. 누가보아도 공산주의 정책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지 않는 지주들이 이승만 때문에 많이 참았다. 비록 문제가 없지는 않았지만 전반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토지개혁은 성공적이었다. 이 개혁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한국은 필리핀이나 브라질과 같은 상황에서 더 이상 발전하기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라고 했다.
이 교수는 그러면서 "좌와 우가 연합하였을 때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당시 좌우의 극심한 대립도 있었지만 이와 같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딱 거기까지였다"고 전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