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조선의 굴욕적 개방

세계정세에 눈이 어두운 당시의 완고한 조선의 보수파 지도자들은 당시 전래된 천주교에 대하여 철저한 탄압(彈壓)과 쇄국(鎖國) 책을 쓰게 되었다. 1866년 2월 21일 천주교 신자인 남종삼, 장경일, 김장운, 최형, 정의배, 홍봉주 등의 가족을 몰살하고, 프랑스 선교사 9명을 목 잘라 죽이고 조선팔도에 영(令)을 내려 천주교 신자(信者) 수천 명을 학살하였다. 그러자 그해 9월에 프랑스 군함 일곱 척이 와서 자국의 신부들을 학살한 것에 대하여 조선 정부에 항의하고, 강화도(江華島)를 침범하게 되었다. 이것을 병인양요(丙寅洋擾)1)라고 한다.

조선과 미국은 1855년(철종 6), 1865년(고종 2), 1866년에 미국의 배가 각각 조선의 동해안 통천, 영일 연해, 선천군에 표류함으로써 세 차례의 접촉이 있었는데, 이때마다 조선은 미국의 배를 청나라로 호송하는 등 친절을 베풀었다. 그러나 1866년 7월 평양성 내의 대동강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 호를 불태운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1871년 6월 11일에는 미국의 군함 다섯 척과 경기도 근처의 강화 근해에서 포격전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바로 신미양요(辛未洋擾)2)인 것이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 한강가의 절두산에 세워져 있는 척화비
서울 마포구 합정동 한강가의 절두산에 세워져 있는 척화비 ©위키미디어

여러 차례 서양의 함대를 물리친 대원군은 의기양양하여 외국이 무서운 것이 없다 하고 더욱 척양쇄국(斥洋鎖國)의 결심을 굳게 하였다. 그리하여 종로와 지방의 각 곳에 척화비(斥和碑)3)를 세우고 쇄국책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작은 승리에 취한 조선의 완고하고 보수적인 쇄국정책은 조선을 우물 안 개구리 격으로 전락시켰다. 당시 조선의 지도자들은 청국 이외의 다른 민족은 야만으로 알고 서양인들과 접촉을 단절하고 사대주의에 사로잡힌 정책들을 택하는데, 결국 이 정책들은 조선을 후진국으로 허덕이게 만들고 일체 침략의 단초를 제공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이 왜구(倭寇)라고 부르며 업신여기던 일본은, 1854년 3월 미일(美日) 가나가와 조약을 맺고 미국으로부터 전신, 기차, 기술자를 청빙하여 그들에게 관련 기술을 배웠다. 또한 외국어를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하였고, 대포와 군함을 사들이고, 대포와 소총도 제작하였다. 일본은 수병(水兵)과 마병(馬兵)을 서양식(西洋式)으로 훈련시키고, 각 지방에 신교육을 위한 소학교를 설치하였다. 이때부터 벌써 그들은 조선보다 발전된 문명을 갖게 되었고, 침략의 야욕을 키웠다. 1882년 한미수호 조약을 통하여 개화된 조선에 비하여 일본은 30년이나 앞선 문명과 기술, 군사력을 가지고 조선을 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을사늑약 풍자화
호머 헐버트가 발행한 ‘코리안 뉴스페이퍼’(Korean Newspaper)에 실린 에 실린 1905년 을사늑약 풍자화. ‘한일협약도’(韓日脅約圖)라는 제목과 ‘일본이 한황을 위협해 조약을 늑정’이라고 설명하여 조약의 부당성을 고발했다.

일본은 1876년 2월 강화도에 서양식 군함 다섯 대를 대어 놓고 조선을 위협한 운양호 사건을 시작으로 하여, 1882년 자국의 공사관 보호를 구실로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였다. 또한 1894년에 일어난 조선의 동학란(東學亂) 진정을 구실로 일병 70,000명을 조선에 파견하는데, 결국 이 일은 청일(淸日)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리고 1894년 내정적폐(內政積弊)를 구실로 조일 잠정 합동조관에 조인하며 철도부설 및 상권을 빼앗아가고, 1904년 조선의 독립과 영토를 보증한다는 구실로 조일 의정서(議定書)에 조인(調印)하는데, 이 일은 일군에게 조선에서의 행동에 자유를 주는 비굴한 조인이 되었다4).

1905년 11월 17일 소위 을사보호조약이라는 억울한 조약이 발표되었을 때, 장지연은 「시일야(是日也) 방성대곡(放聲大哭)」이라는 제목으로 논설을 써서 호외를 서울 장안에 뿌리고 일경에게 잡혀들어갔다. 지사들은 분에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이들이 비일비재하였고 오적(五賊)5) 암살단이 두 번이나 일어났으며, 충청도와 전라도에는 의병들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일본의 마수(魔手)는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서 점차 조선을 침략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1910년 7월 8일 우리 민족에게는 치욕적인 조일합방(朝日合邦)에 이르게 된다. 같은 해 8월 29일 병합조약문이 공식으로 발표되자 조선 천지는 울음바다로 변하였다. <계속>

[미주]
1) 1866년에 흥선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
2) 1871년(고종 8)에 미국 군함이 강화도에 침입하여 발발한 사건. 대동강에서 불탄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문책과 함께 조선과의 통상조약을 맺고자 하였으나 격퇴되었다.
3) 조선 고종 때 흥선 대원군이 양인(洋人)을 배척하기 위하여 서울과 지방의 각지에 세운 비(碑). 이 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아니하면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내용의 글이 기록되어 있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4) 김세한, 『배재 80년사』, p. 32-34.
5) 을사오적(대한제국 친일파, 乙巳五賊), 1905년(광무 9) 일제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을사조약에 찬성하여 승인한 5명의 대한제국 대신. 을사조약 체결 축하 기념촬영을 하는 일본군 장성 및 일본공사관들.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을 가리킨다.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아펜젤러 #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