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는 영아소동이 있기 3년 전, 1885년 4월 5일 조선에 들어왔다. 조선에 입국한 지 거의 1년이 지난 1886년 7월 24일과 28일 기록한 그의 일기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있다. 그의 이 일기(日記)도 당시 조선의 병약한 사회적 상황을 한 눈에 보여주고 있다.
1886년 7월 24일 (토)
콜레라로 인해 도시 여기저기에 무서운 참상이 벌어지고 있다. 조선 사람들의 무관심 때문에 정확한 통계를 내기가 어렵다. 내 개인 교사, 송씨1)의 말에 의하면 어젯밤에 151명이 죽어서 서대문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그 전날 밤에는 200명, 죽은 사람은 이 문을 통해서만 내보내게 되어 있고 동대문 밖으로 내보내는 경우는 거의 없는 일이다. 서울과 그 주변 마을에서 매일 죽는 사람이 500명가량이 되는 것 같다. 흐느낌과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차 있는 분위기이다. 우리들의 거처와 인접한 성벽에서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어떤 외국인도 거기까지 가서 소리를 듣는 경우는 없다2).
1886년 7월 28일 (수)
콜레라가 조선인들 사이에 무시무시한 참상을 빚고 있다. 15일부터 25일까지 10일간 3,140명이 문밖으로 실려 나갔다. 엊그제 3,140명이 죽었다고 보도되었다. 감소할 추세가 보이지 않는다. 모든 조선인이 긴장하고 있고 정부는 거의 무방비 상태나 다름이 없다. 왕은 외국 의술에 해결을 요청하고 있다. 하룻밤에 한 집안 여섯 명이 모두 죽었다는 보도도 있다. 스크랜턴 부인은 어제 서대문 밖에서 60채의 초막을 보았다고 한다. 성벽 밑에는 그들이 줄을 잇고 있다. 가난한 사람이 콜레라에 걸리면 주인에게서 쫓겨나 돈도 집도 없이 성벽으로 간다. 헤론 의사3)의 문지기도 죽었다. 장로교 고아원의 원장이 말하기를 언더우드의 문지기가 어제 저녁 몹시 아팠는데 아마 지금쯤은 죽었을 것이라고 한다.
시골 역시 콜레라가 성행하고 있다. 사망자 수는 잘 알 수가 없다. 한국과 이탈리아의 조약이 체결되었다. 공사관 직원 한 사람이 콜레라에 걸렸는데 알렌 의사가 치료했다. 스크랜턴 대부인이 지난 두 주일간 기력을 잃고 있었다. 주로 뜨거운 날씨 때문이다. 그녀와 스크랜턴 의사가 바닷바람을 쐬며 쉬려고 어제 인천으로 갔다. 그녀로서는 여름이 견디기 힘든 계절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잘 있다. 그러나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우리 선교부는 1887년 예산을 세우고 있다4).
이 글은 당시 조선에 사회적인 상황이 얼마나 질병에 열악(劣惡)하였는지 말해 주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당시 여름 동안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이 돌면 그것을 막을만한 특별한 예방책이 없었다. 서울 장안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이러한 전염병으로 죽어서 성(城) 밖으로 실려 나갔다.
당시에 조선인들은 콜레라를 ‘호열자’(豪列刺)로 불렀다. 콜레라를 호열자로 부른 것은 당시 무시무시했던 공포의 기억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호열자’는 호랑이가 살점을 찢어내는 고통을 주는 질병이라는 뜻이다.
조선 시대는 역병(疫病)의 시대였다. 호열자 외에도 대표적인 역병으로는 두창(바이러스성 소아전염병), 염병(장티푸스·이질), 당독역(성홍열), 마진(홍역), 시기병(독감 인플루엔자) 등이 꼽혔다. 이처럼 조선인들은 창궐하는 역병에 마땅한 대책이 없었다. 혜민서(惠民署)나 활인서(活人署)와 같은 전염병 담당기관이 있었으나, 이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피난과 격리가 고작이었다. 가장 중요한 역병 대책은 병을 가져다주는 귀신(鬼神)을 달래거나 몰아내는 방법이었다. 역병은 귀신이 일으킨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가에서 할 수 있는 역병을 쫓는 예방책은 고작해야 ‘단오에 창포주를 마시고 동짓날 팥죽을 먹으면 역병을 피할 수 있다’는 정도였던 것이다5).
당시에 민간(民間)에서는 굿을 하여 귀신을 내쫓아야 병이 낫는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병이 돌면 도처에 굿이 성행하였다. 다음은 1897년 3월에 선교사 노블 여사가 평양에서 쓴 일기의 일부이다. 이는 당시 조선의 의료 수준과 생각을 짐작하게 해준다.
1897년 3월 7일 무당의 굿
우리 집 근처에 있는 어느 집에서 어제 종일 밤늦게까지 북과 바라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이유를 알아보니, 그 집의 아이가 병들자 부모가 아이에게 들린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무당을 부른 것이었다. 아이 엄마를 만나 무당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하여, 오후에 한국인 여신도(女信徒) 한 명과 함께 그 집의 열린 마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러나 소리가 너무 시끄럽고, 정신이 없어서 우리가 하는 말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지경이어서 다른 적당한 때에 여신도 두 사람을 보내 이야기해 보기로 했다6).
셔우드 홀이 쓴 『닥터 홀의 조선회상』이라는 책에 보면 당시 조선인들이 서양인들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모습이 재미있게 그려져 있다. 이 글은 의료선교사 부부로 활동한 윌리엄 제임스 홀과 닥터 로제타 홀이라는 두 분 사이에 태어난 셔우드 홀이 쓴 것이고, 그는 평양에서 1902년에 출생했다.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처음 보는 서양 아기가 그처럼 신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 나의 부모는 갓난아기였던 나를 병원 마당에 내놓고 자주 현지 주민에게 전시했습니다. 서양의 백인 아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정말 궁금해하는 조선 주민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내가 부모의 선교사업을 도와준 일의 시작이었습니다. 내 부모의 의료선교 활동에 있어서 나는 훌륭한 홍보역할을 담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나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가 나를 예쁘다고 칭찬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마다 조선 아이에 비해 너무나 큰 코와 파란 눈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에구머니나, 양귀(洋鬼) 아들은 꼭 개눈 같은 눈을 가졌네.’ 조선에서는 개만이 파란색 눈을 가진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7).”
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오늘날의 안목(眼目)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광경들이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 조선인들의 자화상이었고, 세상 물정에 눈이 어두운 조선인들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계속>
[미주]
1) 송훈성 씨로 아펜젤러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후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1898년 부인과 아들을 남겨두고 별세하였다. 그의 아내는 정동교회의 전도 부인이 되었다.
2) 아펜젤러(정동제일교회 역사편찬 위원회 역), 『자유와 빛으로 헨리 G. 아펜젤러의 문건 II, 일기』, (서울, 정동 삼문출판사, 1998), p. 20
3) 양화진 묘역에 최초로 묻힌 선교사는 존 W. 헤론(John W. Heron, 惠論) 선교사이다. 그는 1858년 6월 15일 영국에서 출생하여 미국으로 이민하였으며, 동테네시주 메리빌대학과 뉴욕종합대 의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1884년 4월, 미국에서 한국으로 파송하는 최초 선교사(장로교파)로 정식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해티 깁슨(Hattie)과 결혼했다.
헤론 부부는 당시 한국의 정치 상황이 불안하여 일본에서 1894년 4월부터 다음 해 6월까지 머물다가 1885년 6월 21일 한국에 입국하였다. 그는 의료 선교사로 입국하여 알렌(H. N. Allen)의 후임으로 광혜원(제중원) 원장과 고종 임금의 시의(侍醫)로서 가선대부(嘉善大夫) 벼슬을 하여 혜참판(惠參判)이라 불렸다. 그의 업적은 우리 나라에서 병원 사업과 성서번역 사업을 비롯하여 기독교 문서사업에 크게 기여하였다.
성서 출판을 위하여 1887년에 조직된 성서번역 상임위원 4인 중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으며, 1890년 6월 25일 창설한 기독교서회 창설자였다. 그는 1889년 언더우드의 압록강 세례문제와 관련하여 언더우드와 헤론 간에 불화도 있었다고 한다.
헤론의 인간성에 대하여 기포드 선교사는 1897년 코리안 리포지터리에 「헤론의 성격은 오래 사귄 뒤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그는 의지적인 사람이며 자기 책임은 철저히 지켰다. 그는 의사로서 강한 희생정신과 사랑의 정신과 인술로써 모든 어려운 의료사업을 담당해 냈다. 절대로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몸을 아끼는 법이 없었다. 그는 과로와 정신적 긴장 때문에 기진맥진하여 질병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고 하였다.
헤론은 1890년 7월 26일 결국 한국에 온 지 5년 만에 이질에 걸려 33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으며 양화진에 묻힌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묘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라고 쓰여 있다.
4) 아펜젤러(정동제일교회 역사편찬 위원회 역), 『자유와 빛으로 헨리 G. 아펜젤러의 문건 II, 일기』, (서울, 정동 삼문출판사, 1998), p. 21.
5) 경향신문 2004.11.05
6) 매티 윌콕스 노블, 『노블일지 1892-1934』, (서울, 이마고, 2010), p. 90.
7) 셔우드 홀, 『닥터 홀의 조선회상』, p. 23.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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