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박명수 교수)가 6일 오전 9시 30분 ‘한국과 일본에서의 사중복음의 역사’라는 주제로 제10회 한일성결교회 공동역사연구 포럼을 온라인 줌을 통해 진행했다. 이날 박명수 교수(서울신대 명예교수)는 ‘일제 말 광주지방법원 소송기록에 나타난 총독부의 한국성결교회의 탄압’이라는 제목으로 발제했다.
박 교수는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하면서 내선일체를 강조하여 한국인들을 전시동원체재에 끌어드리려고 하였다. 그리해서 일본은 내선일체를 주장하며, 한국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며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들어 전시에 동원하려는 것이다. 이 신사참배는 개신교 신앙과는 매우 직접적으로 대립된다. 개신교는 처음부터 유일신 사상과 우상숭배 반대를 강조했다. 신사참배는 여기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사실 신사참배는 한일병합 초기부터 일본이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이며, 192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추진하려고 했다가 반발을 우려해 연기했던 것을 만주사변 이후 다시 추진하였다”며 “처음에는 미션 스쿨을 중심으로 일본은 압박을 했지만 중일전쟁 이후에는 개신교회 자체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고 덧붙였다.
또한 “한국교회는 감리교와 성결교회를 포함하여 대부분 일제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수용하였으나 가장 강력하게 반발한 것이 장로교”라며 “일찍이 1930년대 중반부터 평양의 북장로교선교사들은 신사참배 반대를 분명히 하였고, 주기철 목사는 이런 신사참배반대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1938년 장로교 총회는 일제의 강요를 못 이기고, 신사참배를 수용하고 말았다. 그러나 기독교를 제외하고는 신사참배에 반대했던 단체는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중일전쟁 이후 일본의 가장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가 한국 기독교를 일본 기독교로 만들어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것이었다”며 “우선 총독부는 1943년 초부터 기독교의 여러 교파들을 하나로 묶어서 한 교단으로 만들고, 이것을 통해서 기독교를 통치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런 일본의 정책은 한국에서 장벽을 만났다. 하나의 교단이 되려면 공동의 신조가 있어야 하는데, 일본은 독일 기독교를 따라서 구약을 기독교의 경전에서 제거하려고 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성결교회의 이명직은 여기에 강하게 반대하였다. 평생 성경을 가르쳐 온 이명직은 신약과 더불어 구약을 기독교의 근본 경전이라고 생각하였다”며 “결국 이런 통합작업은 성공하지 못했다. 총독부는 성결교회의 이명직은 교단통합에 장애가 되는 인물이라고 보았다”고 했다.
이어 “총독부는 방향을 바꾸어서 교단별로 일본과 한국의 교회를 묶어서 한국교회를 일본교회 통치 아래 놓으려 하였다. 그래서 1943년 5월에 장로교는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성결교회는 일본기독교조선성결교단으로 바꾸었다”며 “감리교회는 이 문제로 진통을 겪었으나 같은 해 8월에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이 출범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반대하던 그룹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1945년 7월에 다시금 조선의 모든 교회를 하나로 묶어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만들었고, 통리에는 김관식 목사를 선출하였다. 종전 직전까지 일본은 기독교를 철저하게 통제하려고 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일제 말 총독부의 중요한 관심은 재림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이 가장 염려하는 것은 일본의 국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결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 세상에 천황이 아니라 예수가 중심이 되는 천년왕국을 만든다는 재림론을 갖고 있었음으로 당장 현재 일본이 추구하고 있는 천황중심의 대동아공영권과 배치되는 것이었다”며 “성결교회는 재림을 성결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중복음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총독부와 직접적으로 부딪히게 되었다”고 했다.
이어 “문제의 시작은 1942년 6월 일본에서 시작하였다. 일본은 ‘사상통제정책’을 발표했고, 여기에 의해서 일본성결교회의 교역자들은 일제히 검거되었다. 일본성결교회는 처음에는 신사참배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지만 문제는 재림이었다”며 “성결교회의 재림교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기 때문에 천황의 신성을 모독하고, 천년왕국을 말하기 때문에 일본제국주의를 무시하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기 때문에 시온주의(또는 유대주의, 유태주의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한 민족주의 운동)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1943년 4월 7일 일본 문부성을 성결교계통의 교회에 관하여 설립인가 취소를 내렸고, 내무성은 결사금지 처분을 내렸다”며 “이런 영향이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 경시청으로부터 같은 계통인 한국성결교회도 폐쇄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성결교회에 대한 탄압은 1943년 5월 24일, 주일 다음 날인 월요일 아침 5시를 기하여 일제히 시작되어 교역자 200명, 장로, 집사 100명을 검거하였다. 이와 동시에 기독교 단체들 가운데서 재림을 강조하였던 침례교(동아기독교)와 안식교도 같이 수난을 당하였다”며 “이 조사는 각 지역의 지방법원별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이어 “6월에서 8월 사이에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명직 목사외 20명, 8월에는 대구지방법원에서 목사 3명, 9월부터는 광주지방법원에서 목사 2명, 9월에는 해주지방법원에서 교역자 6명, 12월에는 평양지방법원에서 2명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며 “1943년 5월 24일 검거에 이어 같은 해 9월부터는 성결교회 예배 중지령이 내려졌고, 같은 해 12월 29일에는 드디어 성결교회가 폐쇄되었다. 이렇게 해서 1917년에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성결교회는 일본에 의해서 문을 닫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총독부는 12월 28일 한국성결교회 지도자들을 석방하였고, 29일 오전 11시 20분에 서대문에 있는 교단본부에 통리겸 총무국장 이명직, 전도국장 최석모, 교육국장 이건, 연성국장 박현명, 재무국장 최영택, 총무겸 주사 안창기, 참여 박형순이 모여 교무회의를 열고, 이명직의 사회로 해산성명서를 가결하고 발표하였다”며 “형식은 자진 해산이지만 내용은 총독부가 모든 것을 작성하고 이명직 목사와 간부들을 강요하여 해산하게 한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 해산성명서에는 일본이 하고자 하는 내용이 다 들어 있었다”며 “성결교회는 첫째, 영미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둘째, 재림사상으로 일본의 국체를 무시했고, 셋째, 구약을 강조하여 유태사상을 갖고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박 교수는 “일제 말 광주지방법원 소송기록에 나타난 한국성결교회 관련 내용을 보면 성결교회의 남자 교역자의 경우 상당한 경력을 갖고 있었으며, 여자 교역자의 경우 혼자된 사람이 많았다는것을 알 수 있다”며 “아울러서 평신도지도자들은 압도적으로 상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당시 성결교회에 대한 인식이 좋았고, 남장로교신자였다가 나중에 성결교회로 옮긴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어 “한국성결교회와 총독부 사이의 마찰에 대해 주목하면 1943년 초 중앙에서는 이명직 목사가 교단합동에 반대해서 합동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반면에 전라남도 지역, 특히 본 자료에 나오는 목포와 광주의 경우 성결교회는 그 지역의 교회들과 연합해서 성결교회와 분리해서 합동기독교회라는 새로운 교회를 만들었다는 점”이라며 “따라서 법적으로 본다면 이 교회는 이미 1943년부터는 성결교회가 아니었던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것은 신사참배에 관한 것이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전 성결교회는 신사참배 반대라는 명백한 입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1937년 이후 교단의 입장이 바뀌었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새로운 입장에 의해서 신사참배를 수용하고 있다는 것”이라며 “그리해서 일본 경찰은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서는 그들의 의견서에 아무런 의견을 내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성결교회의 재림교리의 천년왕국설이 과연 일본의 국체를 반대하여 치안유지법을 위반하였는가 하는 문제”라며 “그리스도가 지배한다고 믿는 천년왕국과 천황이 지배한다고 믿는 대동아 공영권은 서로 대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성결교회는 재림교리는 순수한 복음이라고 강조했지만 일본은 이것을 매우 정치적인 선동이라고 해석하였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복음은 일본의 국체명징과 대립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했다.
박 교수는 “일본의 주장 배후에는 기독교가 미국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으며,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영미의 노예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에 가장 앞장 선 사람이 바로 이명직이라고 보는 것”이라며 “일제 말 이명직과 성결교회를 친일적인 단체로서 이해하려는 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평가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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