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1883년 서울, 그리고 영아(嬰兒) 소동

아펜젤러 내외분과 언더우드, 그리고 스크랜턴과 그의 아내와 어린 딸, 그리고 스크랜턴의 어머니 등 그의 가족이 조선에 입국하던 1885년 당시의 시대적인 분위기를 알려주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글이 전해지고 있다.

헨리 게르하르트 아펜젤러 선교사와 부인 엘라 다지 아펜젤러 선교사의 20대 시절.
헨리 게르하르트 아펜젤러 선교사와 부인 엘라 다지 아펜젤러 선교사의 20대 시절. ©내리교회

아펜젤러가 조선에 입국한 지 3년째 되던 해인, 1888년 6월에 서울에서는 영아(嬰兒) 소동이라고 불리는 웃지 못 할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미국공사관의 서기(書記)인 찰리 롱(Chali Long)이 서울 주변에서 조선 어린이들을 촬영한 사진 가운데, 몇 장을 도둑맞으면서 시작되었다. 찰리 롱의 사진이 사라진 지 며칠이 지난 뒤, 서울에서는 어린이 시신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 어린이는 행방불명 되었는데, 이후 살해되어 시신이 훼손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며칠이 안 돼 또 다른 어린이도 시신이 훼손되어 지난번과 유사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참혹한 사건에 대해 조선 사람들은 서양인들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서양인들 특히, 당시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조선의 갓난아이들을 납치해서 죽인 다음, 물에 끓여 이들의 눈을 빼서 밀가루에 넣고, 맷돌에 간 다음에 유리판에 펼쳐 말려서 사진이나 약을 만든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영아 소동이 발생한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당시 젖소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유를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인들은 외국인들이 깡통에 보관된 우유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조선인들은 외국인들이 조선의 여자들을 납치한 뒤에 이들의 가슴을 절단해서 우유를 만드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사람들은 살해당한 아이들에 대한 보복을 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그들의 분노는 언더우드가 운영하는 고아원으로 향했다. 당시 고아원이라는 개념은 한국인들에게는 대단히 생소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은 가족이나 집안사람이 아닌 사람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에 대해 익숙하지 않았다. 조선 사람들은 외국인들이 비밀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조선의 어린이들을 미국에서 노예로 팔거나 또는 식탁용으로 살찌우기 위해 모으고 있다고 생각했다. 외교 사절들이 어린이들을 먹고 있다는 소문도 서울 거리에 나돌았다.

당시 작성된 한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에 거주하는 일부 중국인들이 흘리는 악의적인 소문에서 미국 공사 자신도 식탁 위에 구운 아기를 올린다고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서양 외교관들은 소동을 진정시켜 달라고 조선 정부에 탄원했다.

한편 조선의 관료들은 외국인들이 어린이를 구입하지도 먹지도 않는다고 부정하기보다는, 이 문제를 지금 조사하고 있다는 의심을 부풀리는 포고령을 발표해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그리고 어린이들을 파는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보면, 이를 따라가 추적하고, 이들의 거처를 당국에 알려 만약 죄가 있으면 처형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사람들을 격려했다.

사태가 악화함에 따라 폭도들이 서울에 있는 외국인 거주지역을 습격하려 한다는 소문이 팽배했다. 이에 미국 공사 딘스 모어는 제물포에 정박 중인 미군함 에섹스호로 전보를 보내 일단의 해병들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미국 함대에서는 곧 28명의 해병을 파견했고, 이들은 12시간 동안 걸어서 새벽 2시에 서울에 도착했다. 조정의 관료들은 군대의 파견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며 항의했다. 그러나 다음 날, 프랑스와 러시아 해병들도 도착하면서 서울의 상황은 현저히 진정되기 시작했다. 고종은 서양인들이 여성의 가슴을 도려내기 위해 죽이지도 않았으며 어린이들도 먹지 않았다는 포고령을 발표했고, 고종이 내린 이 칙령으로 인하여 사태는 드디어 종식되었다1).

당시 이러한 소동에 대한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다. 찰리-롱은 고종의 아버지인 대원군이 이러한 소동의 배후인물이며, 그가 갓난아이들을 도륙하라고 명령을 내린 장본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대원군이 외국인들에 대한 증오감을 불러일으키고 궁극적으로는 고종을 권좌에서 축출하기 위해 이러한 방법을 동원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중국 공사인 위안스카이도 고종의 통치를 불안하게 하기 위한 방안의 일환으로, 서양인들이 어린이들을 학살하고 능욕하고 있다고 서울 거리에 헛소문을 퍼트리도록 중국인들과 한국인들을 동원했다고 알려졌다. 결국 영아 소동은 서양인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의심과 불신을 이용해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공작이라고 할 수 있다2).

이 소동은 당시 조선의 수준과 형편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미주]
1) Charles D. Stokes (장지철, 김흥수 역), 『미국 감리교회의 한국 선교역사 1885-1930』, p. 55.
2) http://jungdong.culturecontent.com/main/view.asp?seq=cp0710a00100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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