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모 교수
류현모 교수

미국 캘빈대학의 철학교수였던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려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의 기본 사고유형은 기독교 세계관이 아닌 과학적 세계관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라고 하면서, 기독교가 제시하는 사상의 토대가 지성적인 삶으로부터 오랫동안 조직적으로 배제되어 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을 나 자신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세계관에 비춰봤을 때 사실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초, 중, 고등학교의 공교육과 과학계의 패러다임이 된 진화론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창조론과 십자가의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복음을 믿을 수 없는 신화로 만들어버렸다.

나의 경우 젊은 시절 형성된 진화론적 세계관은 40대 중반의 진정한 회심 이후에도 여전히 내 학문세계의 패러다임으로 굳건히 유지되고 있었다. 즉 성과 속을 구분하여 세상에서는 세상의 법을 교회에서는 교회의 법을 따르는 이원론적 태도를 아주 자연스럽게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원론적 태도는 상당기간 유지되면서 ‘교회 속의 나’와 ‘세상 속의 나’가 상호 모순되면서 서로 충돌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는 하였으나, 그 원인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몰랐다.

데이비드 노에벨의 ‘Understanding the Times’라는 책을 <충돌하는 세계관>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 이념 간에 벌어지고 있는 영적 전쟁의 실체를 파악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법을 교회당 안으로 제한하려는, 더 나아가서 교회 안에서도 부정하게 만들려는 것이 진화론을 추종하는 다양한 무신론적 세계관의 정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충돌하는 세계관>의 생물학 부분에 대한 강의를 요청받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관심도 고민도 없이 패러다임으로 그냥 수용하고 있었던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 새롭게 공부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놀랍게도 현대과학의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은 진화론이 불확실한 가정이라는 기반 위에 거짓 증거들을 근거로 확대재생산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모든 무신론의 이념들과 다른 유신론 세계관들이 합심하여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없애려는 끝없는 노력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주입된 무신론적 세계관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대학에서 공부를 하거나, 사회생활을 할 때 자신의 신앙과 세상의 지식이 서로 충돌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무신론적 인본주의 이념을 따르는 현재의 교육은 세속의 지식을 받아들일 때 기독교의 지적 기반인 성경의 지식을 막연한 종교적인 믿음이나 신화로 폄하한다. 미국의 포스트모던 교육철학자인 리처드 로티는 “우리는 기독교인 학생들에게 인본주의적 세속화가 주는 이점을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들이 근본주의 부모들의 악하고 위험한 손아귀에서 벗어나 나와 같은 사람들이 전하는 선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도록 교육해야 한다. 우리의 교육목표는 혐오감이나 불신 없이 다윈이나 프로이트 저서를 읽고, 동성애나 젠더 이슈에 대한 시각을 우리와 흡사하게 맞추어가도록 조정하는 것이다.”라고 공언한다. 우리는 유식해 보이는 인문학이나 아름답게 보이는 예술로 포장된 세속의 무신론 이념의 허구를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세상의 학문을 할 때, 어떤 분야의 정보와 다른 분야의 정보 사이에 통합이 필요하다. 각 분야의 정보 사이에 모순이 없는 통합이 촘촘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을수록 더 강한 힘을 발휘한다. 예를 들어, 각 학문별로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배웠다고 하자. 법정의의 측면에서 동일한 죄에 대해 모든 사람에게 같은 처벌을 하는 것이 정의롭다고 배웠고, 정치정의에서는 약한 자를 보호하는 것이 정의라고 배웠다고 하자. 그러면 학교에서 배운 이런 정보가 어떻게 통합되어야 하는가? 만일 사회적 약자가 일반인과 같은 범죄에 가담했을 경우 우리가 배운 법정의와 정치정의가 분명히 충돌하게 된다. 우리는 그 정보를 통합하면서 부딪치는 부분에 대해 찬반양론을 충분히 검토해야 한다. 그 후에야 정의에 대한 지적 정보는 통합되어 지식의 수준으로 격상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의 수준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절대적 기준에 합당해야 할 것이다. 무신론자 혹은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뉴에이지와 같은 범신론에서는 절대적 기준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들은 시간, 장소, 상대에 따라 잣대가 바뀌기 때문에 지식의 통합이 불가능하고 해체된 정보들만 있을 뿐이다. 기독교에는 성경의 통전적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절대적 기준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받아들인 새로운 지식들은 그 기준에 대비하여 수용하거나 거절할 수 있다. 수용된 지식들은 자신이 가진 진리에 합하는 지식체계 속으로 일관성을 가지고 통합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삶은 지식과 진리를 지적으로 통합하는 수준에서 그칠 수 없다. 그것들이 우리 삶에서의 모든 선택과 행위의 기준으로 실제 작동할 때 우리의 신앙과 지식과 삶이 일치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을 비교하시며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의 여부에 그 기준을 두셨다(마 7:24~27). 우리가 성경의 진리와 그 진리에 충돌해오는 다른 세계관들을 공부하는 이유는 성경이라는 진리의 반석 위에 견고하게 통합된 기독교 세계관을 형성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만드는 영적전쟁에서(고후 10:4~5) 모두 승리하시기를 기도한다.

묵상: 전문분야의 지적정보와 성경의 진리 사이에 괴리가 있을 때 어떤 선택을 하는가?

류현모(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분자유전학-약리학교실 교수)

* 류현모 교수는 지난해 6월 11일(온라인)부터 본지에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글을 연재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글을 끝으로 지난 약 1년 간의 연재를 마무리 합니다. 그 동안 류현모 교수의 글을 아끼고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기독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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