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주임사제 주낙현 신부가 2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제, 저편으로 건너가자!'라는 제목의 성찬례 강론을 나눴다. 이 강론에서 주 신부는 "인생이 고통의 바다라는 현실은 굳이 종교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분명히 알 수 있는 진실이다. 이를 해결하겠다고 여러 종교가 서로 경쟁하듯이 답을 제시하고는 한다"고 운을 뗐다.
주 신부는 이어 "종교로는 어림없으니 좀 더 현실적인 사회와 경제 문제로 접근하려는 노력도 있다"면서 "여기서 정치와 이념이 등장하여 서로 대결하며 다투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될 대로 되라는 태도로 무엇이든 무관심하며, 주어진 조건에서 자신의 쾌락에만 집중하는 삶을 선택하기도 한다"고 했다.
주 신부는 "이렇게라도 해법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런데 급히 해결하거나 피하려는 몸부림이 거칠면 거칠수록 그 고통은 더 심해지고 만다. 갈증이 난다고 바닷물을 계속 마셔서는 안 된다. 민물이 없다면, 짠물이라도 햇볕에 증류하는 과정과 기다림이 필요하다. 같이 사는 방법을 찾겠다는 뜻을 세워놓고서는 오히려 다른 사람을 공격하거나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 서로 동의하는 가치와 부분을 먼저 찾고서, 그 위에서 서로 다른 강점들로 서로 도와야 한다. 혼자만이라도 잘살겠다고 무책임하게 살 수는 없다. 그처럼 다른 사람도 무책임하게 살면 그 행동이 서로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주 신부는 고통의 바다를 해쳐 나갈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그는 "세상에서 떠드는 처세술이 아니고, 여기저기서 미혹하는 종교의 입놀림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더 귀 기울여야 할 때"라며 "이때 분명하게 드러나는 진실이 있다. 하느님은 한적한 산골짜기에 계시지 않다. 하느님은 산을 넘고 바다를 휘젖는 폭풍 속에 계신다. 주님은 평온한 고요 속에 계시지 않는다. 위태롭게 휘청거리는 파도 속 깊은 곳에서 우리 함께 흔들리는 한가운데 계신다"고 전했다.
그는 "다만, 하느님은 폭풍에 잠기지 않고, 파도에 쓸리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진실은 이렇다. 우리는 삶의 고난과 번뇌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진실은 이렇다. 그 고통과 고난 한가운데서도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신다. 그 때문에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고, 우리 삶의 주인이시다"고 강조했다.
이어 풍랑으로 배가 가라앉게 되었는데도 예수께서 평온히 배에서 주무신 사건에 대해 그는 "이 사건에 여러 해석이 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삶의 고난을 겪는다고 해석하여 신자들의 부족한 믿음을 핀잔하는 데 쓰기도 한다. 예수님만 믿으면 인생의 풍랑은 잔잔해진다고 쉽게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좋은 기대일망정, 그렇게 쉽게 해결되는 일은 없다. 우리는 더 깊고 너른 차원을 향해 가야 합니다. 우리 내면을 성찰하는 차원과 우리 삶으로 이뤄나갈 '하느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짚어야 한다"고 했다.
주 신부는 "여기서 저는 역사상 가장 탁월한 신학자이자 주교였던 어거스틴 성인(354~430년)의 풀이를 자주 되새기고는 한다"며 "성인은 예수님과 제자가 함께 탄 '배'를 신앙인과 교회의 내면 상태로 풀이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모시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 걷는 사람이다. 종종 배를 위태롭게 하는 거센 바람을 만나서 신앙이 흔들리기도 한다. 이런저런 일로 생활이 힘들고 마음마저 약해지는 일이 있다. 이런저런 소문과 협잡에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때 생겨나는 것이 화입니다. 분노다. 늘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러나 자신의 화와 분노를 주님과 함께 살피지 않고, 자기 혼자서 다른 쪽에만 하기 시작할 때 문제가 생긴다. 내면에서 분노의 파도가 일기 시작하고, 심지어는 모종의 복수심으로 변한다. 이것이 오히려 자신을 더 큰 위험에 빠뜨린다"고 밝혔다.
어거스틴의 해석도 소개했다. 주 신부는 "우리가 고통의 파도에 휩싸이는 까닭은 일상 속에서 예수님은 주무시도록 내버려 두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서 "십자가로 용서와 화해를 보여주신 예수님을 우리 안에 늘 깨우고 일으켜 세우지 않으면, 우리 자신과 교회는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경쟁과 갈등, 분노와 복수심이라는 풍랑에 먹혀 가라앉고 만다. 바른 신앙인은 우리 내면 깊은 곳곳에서, 우리의 식별과 판단 곳곳에서, 예수님을 깨워 그분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함께 걷는 사람이다"라고 역설했다.
주 신부는 "인생의 시련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못하고 있다는 표시가 아니다. 오히려 제대로 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저 편안했던 육지를 떠나서, 주님과 함께 흔들리는 배에 올라타고 하느님 나라를 향한 '저편'으로 건너가는 여행을 시작했다는 증거다. 신앙인은 '저 건너편'을 도피의 장소로 상상하지 않는다. 신앙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건너가도록 모험을 감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늘 이야기 뒤에 '저편'에서 만난 것은 더 안전하고 평화로운 육지가 아니었다. 게라사 지방에 다다라서 만난 것이 "군대"라는 별명을 지닌 더 큰 마귀떼였다는 점을 기억하라. 그러나 주님을 깨워 모신 우리는 주님처럼 시련의 마귀를 말씀 한마디로 쉽게 물리칠 수 있다"고 했다.
주 신부는 이어 "우리 마음과 생활에 주님을 항상 깨워 모신 뒤에 나아갈 단계는 무엇일까? 그것은 대화로 열리는 신앙이다. 배움으로 단련되는 신앙이다. 오늘 복음을 잘못 읽으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책망하신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며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워서 대처해 달라고 묻는 장면이다. 이때 주님은 성난 파도를 향해 "꾸짖으셨습니다." 주님은 이 단어를 사물과 악마에게 사용하셨다. 우리 존재가 아니라, 원래 우리 것이 아니었던 성난 마음, 꿈틀거리는 분노를 꾸짖으셔서 쫓아내셨다는 뜻이다. 그런 뒤에 다시 제자들이 잔잔한 상태가 되자 가르침을 주신다"고 했다.
대화의 신앙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주 신부는 "문제에 당면하여 솔직하게 질문하고, 우리의 오해를 걷어낸 후에 그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여 해결한다. 이 대화와 배움을 통한 교정이 없이는 신앙의 '배'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라며 "이런 의미에서 신앙의 반대말은 의심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편리함과 안위를 추구하게 된다. 도전과 변화를 피하게 한다. 그러나 신앙은 배에 올라타는 도전을 합니다. 저 건너편에 가보자고 의지를 다집니다. 시련은 신앙의 일부요, 오히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신호다"라고 했다.
욥의 고난도 인용했다. 주 신부는 "하느님은 인간의 고통을 즐기시는 분이 아니다. (욥의)이 질문에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해산하는 진통을 겪어 낳은 창조 세계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신다. 자신의 모태에서 나온 자녀의 고통을 마음 아파하지 않을 부모가 없다"고 했다.
아울러 "다만, 인간 고통의 호소와 하느님 은총의 응답에는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부모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은총은 종종 고통과 기다림 속에서 더욱 깊이 느낄 수 있다. 아울러, 이 시간의 간격을 견디어 내는 동안, 우리는 세상에서 고통받는 다른 사람을 발견하며 삶의 고통을 세상 전체 일로 바라본다"고 덧붙였다.
끝으로 그는 "바로 여기서 우리는 '이제, 저편으로 건너가자'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다시 듣는다. 신앙 가운데서도 여전한 고통을 인내하면서, 세상의 아픔을 발견하는 항해를 계속하라는 부탁이다. 하느님 나라는 이러한 초월과 항해의 과정에서 서서히 드러난다. 자기 안에 안주하거나 자기보호 감정에 사로잡혀 자신의 고통만 바라보는 '이편'을 떠나서, 더 넓고 깊게 세상의 아픔을 살피며, 예수님의 용서와 화해로 치유하는 '저편'의 하느님 나라로 우리 시선과 행동을 옮기라는 당부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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