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성공회의 인도 파견선교사로 40여년을 섬기고 귀국하여 기독교 변증에 힘썼던 레슬리 뉴비긴은 “성경은 바라 볼 책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세상을 봐야하는 책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성경이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이해해야 하며 성경이 세상을 바라보는 모든 것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암 7:7). 선지자 아모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수직을 측정하는 다림줄을 들고 쌓은 담이 바르게 쌓은 것인지 잘못 쌓은 것인지 판단하신다. 그 절대적 기준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이고, 전체로서 그분을 가리키는 성경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계시하는 하나님은 절대적 주권자, 우리 존재의 근원, 삼위일체, 창조주, 전지전능, 무소부재, 공의와 사랑이시며,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결코 그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분이다. 세상의 무신론자들은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반면 힌두교나 뉴에이지, 정령신앙은 수없이 많은 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말한다. 너무 많기 때문에 모든 것이 신이고 나도 신이다. 이들에게는 신도 절대적이지 않으며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절대적이고 유일한 권위자를 인정하는 기독교 신학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
철학과 과학은 존재의 근원(존재론)과 지식의 근원(인식론)을 찾아가는 학문으로, 지식의 근원과 변치 않는 영원한 진리를 추구해 나간다. 무신론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 우주가 우리 존재의 근원이며, 진화과정에서 인간에 와서야 생성된 이성이라는 것을 통해 지식을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이 유한하고, 세상이 발전하면서 지식은 지속적으로 팽창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말한다. 다신론 범신론을 추구하는 뉴에이지는 누구나 다 신이기 때문에 진리는 상대적이라고 말한다. 기독교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선언하신 예수 그리스도 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말하며, 하나님 아버지께로 이끄는 길이 진리라고 분명히 말한다. 진리가 없다거나 다수의 진리가 있다는 다른 세계관은 설득력이 없다.
윤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무신론자들은 옳고 그름의 기준은 인간들의 합의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하며, 시대에 따라 선악의 기준도 변한다고 주장한다. 뉴에이지 역시 윤리의 기준을 어떤 신에 두느냐에 따라 윤리는 상대적이라 주장한다.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부른 바리세인에게 “하나님 외에 선한 분이 어디 있느냐?”라고 반문하신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만이 절대선임을 우리에게 강력히 말하고 있다. 절대적인 도덕률을 부정하는 사람은 반드시 도덕의 기준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옮기려 하며, 세상의 모든 분쟁은 여기에서 생긴다.
심리학과 사회학에서 무신론자들은 인간의 영혼이란 정체가 없는 것이며 뇌 세포 사이의 신호전달에 의해 생성된 한시적인 것으로 육체의 기능이 정지하면 영혼은 자취 없이 사라진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고통과 악은 잘못된 사회제도에 의한 것이며, 인간은 선하다고 한다. 선한 인간을 지키기 위해 악한 사회를 뜯어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뉴에이지는 고통과 악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며, 스스로가 신임을 깨닫지 못하는 데에서 생긴다고 한다. 방해하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할 때 스스로 신인 것을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에서는 우리의 영은 육체와 함께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며, 첫 사람 아담의 죄로 인한 타락으로 악과 고통이 인류에게 유입되었다고 말한다. 악과 고통의 원인이 타락한 개인의 심령에 있기에 구원은 사회개혁으로는 얻을 수 없으며 예수님 앞으로 회심하는 것이 유일한 길임을 말한다.
법, 정치, 경제학에서는 정의에 대해 다룬다. 무신론자들은 절대적인 정의란 있을 수 없으며, 많은 사람들이 합의한 것이 정의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법은 권력자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만들어지는 실정법이, 정치에서는 권력자들이 원하는 것이 정의가 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경제적 불평등이 모든 악의 근원이며, 그 원인이 되는 경제체제를 뒤엎음으로써 정의를 구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던은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는 모든 것을 불의로 규정하고,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한다. 뉴에이지는 깨달음을 통해 정의를 구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깨달음을 방해하는 어떤 제도나 법도 정의 구현의 방해요소로 생각한다. 반면 기독교는 하나님이라는 절대적인 기준 앞에 모든 사람들을 동등하게 세우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를 창의적으로 사용하여 부를 획득하고, 그것을 경제적으로 취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마음껏 사용함으로써 경제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것이다.
무신론자들의 역사는 우연의 연속이며, 투쟁의 기록으로 승자가 쓴 것이기에 믿을 수가 없고 의미도 없다고 주장한다. 뉴에이지에서는 인간의 윤회의 역사 속에서 쳇바퀴 돌아가듯이 반복적인 삶을 살아갈 뿐이며, 깨달음을 통해서만 그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속에 등장하셨으며, 그분의 언약이 실현될 것을 믿으며 사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창조-타락-구속-완성의 메타네러티브 속에서 설명될 수 있는데, 시작이 있었던 것처럼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종말이 있다.
이처럼 기독교는 전 학문 분야에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고 있다. 절대적 주권자를 믿는 신학, 예수 그리스도라는 절대 진리를 인정하는 철학과 과학, 하나님이라는 절대 선의 존재를 인정하는 윤리학,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가 악과 고통의 원인임을 설명하는 심리학과 사회학, “사랑 가득한 공의”라는 절대적 정의를 말하는 법, 정치, 경제학,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완성의 메타네러티브를 인정하는 역사학 등 모든 기준이 성경 속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수렴된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은 시대를 뛰어 넘어 언제 어디서나 흔들림이 없고 모순되지 않는 일관성 있는 세계관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모든 것이 우연이고, 상대적인 기준에 의존하는 다른 세계관들은 모순투성이의 일그러진 삶의 결과로 드러날 뿐이다.
묵상: 상대를 비난할 때 사용했던 기준을 나에게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가?
류현모(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분자유전학-약리학교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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