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풍성한 삶은(요 10:10; 딤전 6:17) 양자택일의 삶이 아니라 역설(paradox)의 삶이다. 십자가와 영광이 함께하는 삶이다. 권위와 상처가 공존하는 삶이다. 동시에 강하고, 동시에 약한 삶이다. 의미 있는 결정과 행동을, 의미 있는 위험을 마다하지 않으며 품는 삶이다. 강하고도 약한 순종의 삶인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역설의 삶을 품는다. 약할 때 강한 삶을 품는다.
조은아 - 은혜 입은 자의 삶
코이노니아는 코이노니아를 낳는다. 그래서 코이노니아는 열린 공동체이다. 코이노니아는 나눔과 사귐의 방식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요한일서의 가장 큰 주장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육체로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이다(2:22 4:2). ‘육체로’가 결정적이다. 그 영원한 생명도, 그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의 사랑도, 모두 ‘육체로’ 세상 한복판에, 죄와 죽음과 허무가 지배하는 이곳에, 그 아들의 찢긴 살과 흘리신 물과 피로, 부활 생명의 육체로 ‘실제로 나타나셨다.’ 1세기 당시 로마 사회에서 구원이란, 철학에서든지 초기 영지주의에서든지, ‘육체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었기 때문이다. 인구의 3분의 1이 노예였던 사회에서, 자유와 구원이란 이런 감옥 같은 육체를 벗어나고, 영혼을 가두는 물질세계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곳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 아들을 ‘육체로’ 보내셨다. 그 아들은 육체로 와서 육체로 죽으시고 육체로 부활하셨다. 세상은 더 이상 버려진 곳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처럼 사랑하신’ 대상이다. 구원이란, 이 세상을 떠나 육체를 벗고 어디 저 멀리 있는 천당에 가는 것이 아니다. 육체 안으로, 세상 안으로 들어온, 그 아들의 생명과 빛과 진리, 그 아버지의 사랑의 침투이다
채영삼 - 코이노니아와 코스모스
기도는 먼저 구하는 것부터 하는 것입니다. 구하지 않으려면 기도를 왜 합니까? 도와달라고도 못 할 거면 신앙생활을 왜 합니까?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응답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기적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를 구하면 두 개를 주십니다. 제가 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고,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장재기 - 따라 하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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