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센터 북한구원 화요예배 23일 모임에서 탈북민 전성훈 전도사(부산 장신대신대원 재학중)가 간증을 전했다.
전성훈 전도사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면 북한은 태어날 때부터, 눈이 떠지면서부터 수령을 숭배해야 한다. 세뇌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으면서 자라고, 다른 사상을 가지면 그 땅에서 살 수 있는 자격이 없다. 북한의 김일성 혁명 활동 도록이 40판까지 있는데, 어렸을 때 암송대회에 나가서 3등을 했다. 그때는 선생님들이 칭찬해주니까 최고인 줄로 생각했다. 그 삶을 누리던 중에 1994년 만 17세로 군에 가게 되었다. 북한 군은 의무제로 만 17세가 되면 남자는 만 10년 여자는 만 7년 복무를 한다. 군 복무를 3년 하고 잘 못 먹으니까 영양실조가 왔다. 알랑미를 주는데 위의 지휘관들이 다 떼어먹고 나머지로 증기밥을 해서 줬다. 한두 숟가락 정도 양을 먹고 훈련하는데 거기서 죽지 않은 게 천명인 것 같다. 3년 정도 군 복무를 하다가 아파서 제대하게 됐다”고 했다.
이어 “90년대 들어서면서 북한 경제가 많이 흔들렸다. 북한은 개인 소유 땅이 없고 배급표를 받아서 쌀을 받는 배급체제다. 1992년부터 나라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통옥수수를 줬다. 어느 날 그것마저 떨어졌다. 1993년 들어서면서 집마다 옥수수를 갈아서 죽을 쒀서 먹었는데, 죽을 먹는 집은 그나마 행복했다. 그것마저 없는 집은 누에처럼 어디론가 헤집고 나가야 했다. 방향도 없이 나가서 뭔가를 가져오고 자기 것을 팔아서 되바꿔야만 살수 있는 상황이었다. 김일성은 계속 주민들에게 멀지 않아서 쌀밥에 고깃국에 기와집을 해주겠다고 했었다. 북한 주민들은 순수해서 수령님이 내일은 해줄까 모레는 해줄까, 한 해 두 해 10년 20년이 갔다. 그걸 견디지 못해 죽은 사람도 있고 탈북하기도 했다. 그때는 거의 굶어 죽었다”고 했다. .
이어 “1994년에 나라 사정이 엄청나게 어려워졌다”며 “한쪽에서 국민은 죽어가는데 포천보 전자악단이라고 해서 국민들을 선동했다. 당장 배에 들어갈 게 없는데 누가 그걸 보겠는가. 그렇게 나라가 힘든데 김 부자는 나라를 키워간다며 국민에게 나눠줘야 할 자금들을 모두 군사에 집중시켰다. 핵을 만들어야 나라를 건질 수 있다는 게 김일성, 김정일의 사상”이라고 했다.
이어 “1996년 본격적인 고난행군이 시작되면서 많은 사람이 죽었고, 1997년에 330만이 굶어서 죽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앞집 사람이 죽고, 뒷집 사람이 죽고 그렇게 무더기로 죽었다. 형편이 어려우니까 시체를 손수레에 거적때기로 실어나갔다. 우리도 언젠가 굶어 죽으면 저렇게 나가야 한다는 게 무서웠다. 국민은 계속 죽어 나가는데 김일성 시신을 영원불멸하게 모신다고 평양에 금수산기념궁전을 크게 지었다. 그런데 인간은 영원이란 게 없다. 영원은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다. 인간이 영원하단 건 교만에 불과하다. 이처럼 김일성의 교만이 하늘을 찔렀고, 그 삼대 세습으로 자신들의 삶의 부를 일궜다”고 했다.
전 전도사는 “북한은 이동의 자유가 없다.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려면 국가로부터 증명서를 떼고, 차표를 구매해야 한다. 그런데 증명서가 나오는데 한달이 걸리고, 차표는 1~2주를 기다려도 나올지 말지 알 수 없다. 차표를 구매해서 가다가도 단속하는 게 일제시대와 똑같다. 몸수색, 짐수색을 해서 나라에 어긋나면 중간에 사람을 발로 차서 떨구는 독재체제이다. 거기서 저는 33살까지 사회주의를 찬양하며 살았다”고 했다
그는 “2008년에 우리 가족도 다 죽게 되어서 집을 팔아 빚을 갚고 약값으로 쓰고 셋집으로 쫓겨났다. 살길을 찾아 고민하던 중에 국경 쪽으로 가보라는 말을 믿고 갔다. 중국이 보이는 곳에서 감자를 주워 끼니를 이으면서 살았다. 그런데 저희가 함흥에서 국경으로 왔기 때문에 쫓아내면 다시 함흥으로 가야 했다. 함흥에 가면 집도 아무것도 없는데 죽으라는 것과 같았다. 저희를 10t 트럭에 실어서 역전에 버리면 또 이삭 줍는 곳에 오고 또 버리면 또 왔다. 그 상황이 겉으로는 사회주의지만 내면은 일제 36년, 노예살이와 똑같았다. 독재하에서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반항할 수 없었다. 근근이 살아가던 어느 날 저희를 쫓아냈다. 발을 붙잡고 용서해달라고 빌며 사정했다. 당시 구석기 돌막집 같은 걸 지어 살고 있었는데, 발로 한번 툭 치니 와라락 무너졌다. 집 안 소지품, 식기, 가마솥이 바깥에 내동댕이친 걸 보는데 피바다가 연상됐다. 계속 사회주의가 좋다고 했는데, 이 사회를 떠나야겠다는 마음이 불일듯이 일었다”고 했다.
이어 “스스로 죽을 수도 없다는 것을 절감하는데 당시 중국과 북한을 드나드는 밀수꾼 형이 누나를 데려가고 돈을 준다고 했다. 누나를 데려가되 험한 데는 데려가지 말라고 부탁했다. 먹을 게 있으면 누나를 그렇게 보냈겠는가. 누나를 중국 돈 3천 원에 보내고 저도 중국 돈 천원에 팔려 갔다. 그렇게 중국에서 6개월을 그들이 시키는 일을 했다. 누나는 2009년 12월에 북송이 됐는데, 그 이야기를 하면 너무나도 이가 시리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어 “그때부터 무릎을 꿇고 하늘에 대고 저를 살려달라고 호소했다. 그렇게 해서 중국, 라오스, 태국을 거쳐서 하나원까지 왔다. 한국으로 간다니 기쁨과 의구심이 드는 한편, 동족들을 만난다는 기대를 잔뜩 했었다. 그런데 북한 사람들이 중국에서 매 맞고 버려지고 감옥에 쳐넣어지면서 오다 보니까 아픔이 너무나도 많이 쌓였다. 그래서 좋은 말도 약간만 잘못하면 크게 폭발해서 한 사람이 다 죽게 될 때까지 싸운다. 그게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때는 신앙이 없으니까 나가면 이들을 보지 않겠다고 스스로 마음을 닫고 하나원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예배를 드리는데, 믿음이 없으니까 찬양을 부르고 기도하는 게 싫었다. 그러던 중 누나가 북송됐다는 연락에 무릎이 꿇어졌다. 그때부터 현재까지 기도를 한 번도 놓아본 적이 없다. 하나님 살아계시다면 북송된 누나를 살려달라고, 그러면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하겠다고 서원 아닌 서원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어 “열심히 일하며 돈을 버는데 하나님께서 계속 그렇게 열심히 해서 뭐할 거냐는 마음을 주셨다. 누구한테도 손 안 내밀고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했는데, 마지막엔 영이라는 마음을 주셨다. 어떻게 해야 할지 기도하니 탈북민을 섬기라는 마음을 주셨다. 탈북민의 아픔을 보았고 그런 삶을 살아왔기에 스쳐가는 마음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계획하시고 지명하여 부르시고 이곳까지 인도하신 것이었다. 탈북민을 어떻게 섬기고 헌금할지 기도하는 와중에 갑자기 아픔을 주셨다. 아파서 누워있는데, 친구가 밥을 사주겠다고 찾아왔고, 친구를 따라간 곳은 작은 교회였다. 아프니까 밥이나 한 끼 먹고 가려고 들어간 순간, 탈북민 60~70명이 제가 왔다고 고함을 질러서 깜짝 놀랐다. 탈북민들을 안 보려고 했는데, 그들이 반기니까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 같아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다. 나의 의지와 생각대로 갈지라도 그 길을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고백했다”고 했다.
전 전도사는 “하나님께선 계속 신학교에 갈 마음을 주셨다.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모두 신학교로 가라고 하셨다. 90세 된 할머니 전도사님이 기도해주실 때도, 교회 전도사님이 기도해 주실 때도 신학교에 가라는 응답을 주셨다. 믿는 사람들은 조금 착해 보이면 신학교에 가라고 하는가 생각하며 거부했다. 그렇게 2년을 방황하는데 계속 신학교에 갈 거냐, 세상으로 나갈 거냐는 마음을 주셨다. 마지막엔 꽈배기처럼 사람이 비틀어져서 두 손을 들고 신학교에 가게 되었다. 신학교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은 정말 놀라우신 분”이라고 했다.
이어 “그 와중에 주님은 저에게 말씀하셨다. 욥기 23장 10절 말씀처럼 주님은 계속 저에게 사인을 주시고 단련하기 원하셨다. 그 연단 후에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정금같이 쓰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다. 신학교를 그만두고 싶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주님께로 가까이 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마음을 주셨다. 계속해서 하나님께 말씀을 달라고 응답을 달라고 기도했다. 믿음의 말씀, 반석의 말씀을 주셔서 굳건히 서서 신학교에서 이탈하지 않고 북한을 위해서 준비할 수 있는 주님의 도구로 잘 연단시켜 달라고 기도드렸다. 이런 삶을 반복해왔는데, 재작년에 시애틀의 5천 명 규모 교회에서 초청 간증이 있었다. 이사야서 41장 10장 말씀을 주셨다. 지금도 저의 오른손을 붙들어주시고 제가 알지 못하는 방황 속에서도 주님의 뜻을 깨닫게 해주시고, 말씀과 기도로 충만한 삶을 만들어주신 그 주님을 찬양한다”고 했다.
전 전도사는 “마지막으로 저희가 여기까지 온 게 그냥 온 게 아니다. 한국에 정착하고 있는 3만 5천 명의 탈북민 중에서 이유가 없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한 명 한 명 지명하여 불러서 이곳까지 왔다. 이들이 이곳에서 준비되어서 저 북한 땅에 주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주의 도구, 사역자들이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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