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사회적 공공선을 위한 건설적 참여는 교회다움으로부터 시작되고 마무리된다. 교회만의 정체성을 보존하되 동시에 사회적 공공선을 위해 다른 사회 기관들과 연대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도식으로 단순화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공적 참여의 방향성을 안과 밖으로 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부분적인 인정과 비판을 적절하게 하는 입장이 있는데, 바로 공공 신학(public theology)과 급진 정통주의(Radical Orthodoxy)이다.
세계화 상황에서 공공 신학은 하나님의 언약과 일반 은총 차원에서 기독교의 공적 참여가 필요하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창조주는 인류가 더불어 살기를 원하시고, 모든 피조물과 인간 존재를 위한 공공선이 기독교 공공 정책의 궁극적 목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김승환, 공공성과 공동체성
상담을 통해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심히 살고 있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죄책감과 고통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안으로 자신의 효율을 높이는 방법을 찾았지만 그 결과 피로도가 극에 달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우리의 문제는 열심히 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선택을 내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열심히 산다는 것은?선택의 측면에서 보면?열심히 선택하는 것이다. 버릴 것과 가질 것을 열심히 구분해서 버릴것은 열심히 버리고 가질 것은 열심히 갖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늘 선택하는 것을 두려워하다 외부의 압력에 굴복해서 원하지 않는 선택을 하고 만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거나, 호기롭게 선택하는 것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며 스스로 비난하고 위협하거나, 다들 하는 대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결정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노력하지만 결국에는 그 열심 때문에 실패하고 망가지고 무너진다.
살아가는 것은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올바른 선택을 위한 올바른 우선순위와 체계적 가치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신동열, TNTQ
“내 딸이면 포기 안 하죠! 그런데 쟤는 내 딸 아니잖아요?! 그렇게 급하시면 쟤 부모 찾아서 보내세요! 저는 못 갑니다.”
“그래 효천아, 너 말 잘했다. 걔는 네 딸 아니야. 근데 그 아이는 사랑하는 내 딸이다. 세상 사람 모두가 그 아이 보고 손가락질해도, 내가 아직 그 아이를 내 딸이라 부르고 있다. 세상 사람 모두가 저 아이를 외면해도, 내가 아직 기다리고 있다. 세상 사람 모두가 저 아이를 포기한다 해도, 설령 너마저 포기하였다 해도, 나는 절대 포기 못 해! 아직도 내 딸이라 부르며 기다리고 있다. 그것만 좀, 가서 대신 전해주지 않겠니?”
이효천, 품어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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