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중의 하나입니다. 제가 욥기를 좋아하게 된 것에는 개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1987년 여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저는 친구들과 함께 욥기의 연극공연을 보았습니다. 극단 이름은 잊어버렸는데 탤런트 임동진씨가 주인공인 욥으로 등장하고 현대판으로 각색한 것이었습니다. 그 연극을 보고 나서 같이 보았던 친구들과 함께 토론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그때 “이 연극은 너무 피상적이다. 욥기의 메시지를 겉으로만 파악하고 핵심은 꿰뚫지 못한 것 같다”는 취지의 말을 했고, 같이 토론하던 친구들도 “그래, 네 생각이 맞는 것 같다. 그럴듯하다”라고 부추겨 주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저는 그 당시에 욥기를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면서 다소 건방진 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 해, 한국에서 돌아온 후 저는 가을부터 신장이 몹시 망가져서 투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욥기의 내용이 제 삶에 현실이 되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신장투석을 하는 4년 동안 저는 욥기를 많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잘 모르는 채로 했던 말, “욥의 고난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라는 말씀을, 성경을 묵상해 가면서 구체적으로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아, 욥이 경험했던 고난의 본질이 이런 것이었구나.” “아, 욥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런 것이었구나”라는 깨달음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이후로 욥기는 저에게 너무나 깊은 감동과 기쁨과 힘을 주는 책이었고 메시지였습니다.
하나님은 문화 속에서 일하신다. 그래서 그의 영원한 말씀은 특정한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인간 저자가 중요 문화 요인인 인간의 언어로써 성경으로 기록하였다. 그런데 사탄도 문화 속에서 일하는데 거짓과 두려움을 사용하여 인간을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사탄은 육체, 돈, 권력과 성공의 우상 추구가 인간을 생명의 길로 인도한다고 믿도록 인간을 속인다. 이것이 문화의 패러독스다. 그러므로 복음은 한편으로는 문화를 도구로 사용하여 증거되고 전파되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문화의 잘못된 가치들과 세계관을 변화시켜야 한다. 복음의 상황화가 이를 가능하게 해 준다. 올바른 복음의 상황화는 복음의 핵심은 그대로 보존하면서도 그 복음을 듣는 사람의 문화 상황 속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복음은 문화를 변화시키고 초월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은 문화를 변화시키고 초월한다.
하나님과 율법에 대해 전문가인냥 행동했던 바리새인들은 믿음이 약한 자를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이 약한 자, 죄인으로 낙인찍힌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친구가 누구입니까? 그의 입장을 나의 입장으로 삼고 그가 기뻐할 때 같이 기뻐하고 그가 울 때 같이 울어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 12절에서 우리가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 소위 황금률이죠. 예수님의 황금률을 예수님의 생애와 연결해서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게 된 것은 예수님이 먼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대접하셨기 때문입니다. 진정 강한 자라면 사람을 그렇게 대해야 합니다. 그와 나 사이에 차이와 거리를 만들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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