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를 쓴 상태로 거리두기를 하지 않은 예배 모임이 현존하는 급박한 위험을 초래한다는 것은 증명된 바가 없다. 따라서 거리두기 집합제한명령은, 그 제한된 행위 내용이 종교의 자유를 과중하게 제한하는 것이며 그보다 완화된 방법으로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므로 피해의 최소성 원칙에 위반하여 위헌이다.
교회는 그 정의상 모임(assembly)이다. 그것이 교회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클레시아(ekklesia, 부름받은 자들의 모임)의 문자적 의미이다. 모이지 않는 모임은 용어상 모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함께 모이는 것을 폐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는다(히 10:25). 그리고 이 땅의 어떤 국가도 신자들의 모임을 제한하거나, 한계를 두거나, 금지할 권리가 없다. 우리는 국가에 의해 기독교 회중 예배가 불법으로 간주되는 나라에 존재하는 지하 교회들을 항상 지지해 왔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실현되는 현장은 그야말로 평범한 일상이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던져진 이삭들로 너저분한 그 밭, 룻과 나오미의 삶이 밑바닥까지 전락했음을 증명하는 그 밭, 그곳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는 현장이다. 우리는 룻기를 통해 지극히 ‘우연’인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연결되면서 신비한 하나님의 계획이 잉태되고 자라가는 과정을 확인한다. 그 과정에서 나오미는 하나님의 개입을 삶으로 체험하고 입술로 증언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우리 삶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우리의 작은 간증과 고백들은 마치 길안내 표지판처럼 우리를 하나님께로 안내한다. 영적 순례의 길로 들어서게 한다. 결국, 우리 삶이 하나님의 삶에 겹쳐지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변화된다.
이제 와서 이야기지만 솔직히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는 이런 답답함이 있었거든요. ‘왜 좋아도 잠깐 동안만 좋을까? 왜 채워져도 곧바로 허전함을 느낄까? 왜 작은 스트레스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힘들고 아픈데, 반대로 행복한 감정은 왜 이렇게 생기기 어려운 걸까? 원래 인생은 이렇게 스트레스 받으면서 살라고 만들어진 것일까? 도대체 왜 부족한 것 없이 살아가고 있는데도 마음속 씁쓸한 생각에 우울해 지는 것일까? 왜 사냐고 물어보면 속 시원히 답을 못하는 것일까? 그런데 진짜로 나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 것일까? 진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진짜 행복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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