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 성경 독자는 요한계시록을 흥미롭지만 좌절감을 안겨 주는 수수께끼 책으로 본다. 성경의 이 마지막 책은 무수히 많은 주석과 예언 도표와 연구 논문을 낳았으나, 현대의 많은 교회에서 이 책을 낭독하거나 설교하는 일은 별로 없다. 예를 들어, 다양한 개신교 교파에서 사용하는 『개정공동성서일과』는 3년 주기로 읽는 회중 낭독 일과에 요한계시록은 여섯 개의 짧은 본문만 실었다. 이때 선택된 본문을 보면, 하늘의 예배 장면과 약속된 새 창조를 다룬 본문은 포함되었으나 짐승과 용, 큰 바벨론, 하나님의 진노의 인/나팔/대접 심판 순환, 일곱 교회에 주는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다룬 본문은 편의상 포함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아무도 당혹스럽거나 혼란스럽지 않을 기분 좋은 본문만 선택된다. 그런데 문제는 가장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본문은 바로 빠진 본문들이라는 점이다.”
학자와 교사들은 이 수수께끼 책을 푸는 열쇠를 나름대로 다양하게 제시했다. 많은 대중 설교자와 저술가들은 요한계시록을 현재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맞추어 해석한다. 할 린지의 『고(故) 위대한 행성 지구』나 팀 라헤이와 제리 젠킨스의 소설 『레프트 비하인드』와 같은 베스트셀러는 세대주의자의 미래주의 관점에 따라 요한계시록을 해석해 인기를 끌었다. 이 미래주의 관점은 예수가 재림하시리라는 점과 하나님이 이전에 주신 자신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신다는 점을 올바르게 강조한다. 그러나 많은 자칭 “예언 전문가”의 확신에 찬 예견과 분석은 종종 핵심을 놓치고, 요한과 요한계시록 최초 독자의 첫 세기 말 배경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 같다.
한편 성경학자들은 대체로 요한계시록을 엄밀히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짐승”은 먼 미래에 성도들을 박해하는 적그리스도 인물이 아니라 당시 첫 세기 말에 황제 숭배와 경제 압박으로 우상숭배를 조장하던 로마 제국이다. 이런 역사-비평적 관점을 취하는 학자들은 요한계시록을 요한이나 요한계시록 최초 독자와 올바르게 관련시킨다. 그러나 그 가운데 어떤 학자는 요한계시록을 오늘날 신자들이 적용하고 따라 살아야 할 기독교 성경의 관석으로 다루지 못한다.
남자들은 패러독스 속에서 살아간다. 절친한 친구를 갖기를 진심으로 원하지만 누군가가 우리에게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만약 어떤 이가 정말로 우리를 알고 나면 우리를 좋아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걱정한다. 그래서 어떤 이가 우리와 지나치게 가까워지기 시작하면 슬그머니 그에게서 물러서며, 대화의 주제를 바꾸거나 어떻게 그와 헤어질까 고민하기 시작한다. 우리에게는 인정, 즉 다른 사람에 의한 용납이 필요하다. 다른 이들에 의해 거부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하려 한다. 누군가에게 우리의 약점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거부되는 위험을 안전하게 피할 수 있다.
나는 피가 외과 의사에게는 생명을 상징하는데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을 상징한다고는 믿지 않는다. 우리가 성찬을 받음은 또한 그분의 생명에 동참하기 위해서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 6:55-56)라는 말씀이 마침내 이치에 맞아든다. 그리스도는 단지 우리에게 삶의 모본을 보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생명 자체를 주러 오셨다. 영적 삶은 우리 바깥의 천상에 있지 않으며, 열심히 노력해서 얻어 내야 할 무엇이 아니다. 영적 삶은 모든 살아 있는 몸속을 흐르는 피처럼 우리 안에 가득 퍼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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