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보아스는 ‘은혜로!’ 일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크리스천들이 왜곡되게 자주 쓰는 이 ‘은혜로!’는 ‘우리끼리만 통하는, 그저 그렇게!’인 경우가 많다. 성경에서 말하는 값없는 은혜와도 통하지 않고 건전한 일반상식에도 어긋난다. 교회 안에서나 크리스천 공동체에서 이런 잘못된 종교적 편법이 통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성속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사고방식이기도 하고 종교적 편의주의이기도 하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이 ‘은혜로!’의 방법은 위선처럼 보일 때도 많다. 바람직한 성경적 가치관과 배치되는 일도 이른바 은혜로 다 용납되니 문제이다. 보아스는 그렇게 종교적 편의주의를 동원해 합리화하지 않았다. 또한 보아스는 ‘법대로 하자!’며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법이 무엇인지는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그러니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었다. 법대로 하자고 하면서 자기는 예외인 무법한 사람들을 우리는 자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진정한 ‘법대로!’가 아니다. 법대로 하려면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법대로 시행하면 된다는 사실을 보아스는 알고 있었다. …보아스는 자신의 일을 원칙대로 처리했다. 절차대로 일하려고 노력했다. 원칙으로 승부하려고 시종일관 애썼다.”
귀신 들린 그 사람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고백하지만 그가 정말로 하려고 했던 말은 ‘나와 당신은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나를 괴롭히지도 말고, 내 인생에 관여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른 역본에서는 이 표현을 “왜 저를 간섭하십니까?”라고 번역했다. 우리는 어떤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교회에 다니면서 얼마나 예수님과 친밀하게 살아왔는가? 내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가정, 우리 교회는 얼마나 예수님과 교제하며 지내왔는가? 예수님이 당신의 인생에 어느 부분까지 간섭하고 계신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 인생 모든 부분과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간섭이 미쳐야만 한다. 부부든, 가족이든, 직장과 사업의 모든 자리에서든 마찬가지다. 더 나아가, 당신의 삶의 은밀한 영역까지도 예수님이 간섭해 들어오셔야만 한다. 내 마음속 깊은 곳까지 들어오셔서 나와 더 친밀하게 하나가 되셔서 동행해주셔야 한다.
요한복음은 때로 개인의 구원을 강조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요한에게 영생은 개개 영혼의 불멸성을 뜻하는 헬라적 사상이 아니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과 공유하는 생명을 뜻한다. 영생은 한 목자 아래 있는 양 떼의 일부가 되는 것이며, 참 포도나무의 가지가 되는 것이다(10, 15장). 포도나무와 목자의 그림은 이스라엘과 관련 있는 구약의 사상이다(예. 시 80편; 사 5장; 겔 34장). 구약은 하나님이 나뉘고 흩어진 그분의 백성을 모으실 날을 고대하고 있으며(예. 겔 36:24), 요한은 예수의 죽음이 바로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는 일’로 보고 다있(11:52; 참조. 12:32). 이것이 영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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