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많은 사람들이 본문의 의미를 완곡하게 바꾸려고 시도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랑게의 견해가 예수님의 원래 교훈을 더욱 확실히 나타낼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비슷한 격언이 바벨론 탈무드에도 나오는데, 이 곳에는 ‘약대’ 대신에 좀 더 몸집이 큰 ‘코끼리’가 사용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벨론에서는 코끼리가 흔했고, 또 코끼리가 가장 큰 동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교만하고 세상에 부유한 자들이 통과하기 어려운 ‘좁은 문’입니다. 천국은 자기 의를 포기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자기를 의지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제가 인터넷에서 마태복음 19:24에 대해서 이런 글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벌써 천국시민이고 하나님의 칭의와 성화를 받았는데 이 말씀이 조금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본문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마19:24)
반드시 앞뒤 문맥을 살펴라
성경은 반드시 앞뒤 문맥에 비추어서 해석해야만 합니다. 절대로 한 절씩 따로 떼어서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선 24절은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라고 시작합니다. 그럼 앞에서 같거나 비슷한 의미의 말씀을 했고 그것을 다시 강조 내지 보완하려고 이 말씀을 하신다는 뜻이므로 반드시 그 앞의 말씀부터 먼저 살펴봐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19:23) 주님이 강조하려는 주제는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4절은 제자들더러 그 주제를 좀 더 쉽고도 명확히 깨달을 수 있게끔 비유를 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해석법도 바르게 적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질문자께선 이미 신자인데 천국 가기 힘들다고 말하면 이상하지 않느냐고 따졌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부자를 부자인 신자라고 전제하셨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상대로 말씀하셨어도 이 23,24절의 부자는 신자 부자를 뜻하지 않습니다.
앞뒤 문맥에서 따져야 한다고 강조한 까닭이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게 된 경위까지 살펴야 합니다. 한 부자 청년이 주님을 찾아와서 무슨 선할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주님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당신을 좇으라고 답해주었으나 청년은 재물이 많아서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16-22절) 그 후에 주님이 제자들에게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힘들다고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천국 들어가기 힘든 부자는 바로 앞 사건에서 보듯이 선행구원을 믿는 타종교인(본문에선 유대교인) 내지 불신자를 뜻합니다.
성경은 처음에는 장절의 구분 없이 죽이어져 저작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반드시 죽이어서 읽고 해석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결코 단순히 서로 연관 없는 각각의 도덕적 교훈이나 종교적 계명들을 모아서 편집한 책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봐도 되는 거의 유일한 책은 잠언 하나뿐입니다. 삶의 실천 윤리들을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외의 모든 성경책들은 특정한 스토리, 사건, 주제에 맞추어 저작되었기에 반드시 앞뒤로 연결해서 읽어야 하고 나아가 성경전체가 말하는 진리와 연결해서 묵상 해석해야 합니다. 신약의 서신서 같은 짧은 책들은 단번에 전체를 다 읽고 해석해야 합니다. (본 홈페이지를 통해서 제가 입이 닳도록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주님이 부자 청년에게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당신을 좇으라고 대답했지만 선행구원을 지지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재물과 당신 즉, 하나님 둘 중에 분명하게 하나만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의 절대적 주인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에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라고 명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청년은 주님(하나님)보다 재물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기에 그 인생관 가치관이 전혀 바뀌지 않았고 그래서 선행에 실패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따르지 못했기에 구원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 후에 주님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힘들다”고 전제한 후에 낙타와 바늘귀의 비유까지 들었습니다. 따라서 인용하신 인터넷에서 본 19:24에 대한 주석의 내용은 틀리거나 이상한 것이 없습니다. 그대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해석하는 법
낙타와 바늘귀에 대한 비유의 뜻을 알려면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의 성격과 그 해석법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화자(話者)인 예수님이 강조하려는 어떤 주제를 청자(聽者)인 제자들로 더 명확히 알게 해주려는 일종의 예시(例示 illustration)가 비유입니다.
주님의 비유는 조금 독특한데 실화나 간증이 아니라 당신께서 지어낸 스토리입니다. 그렇다고 엉뚱한 상상의 가공물(nonfiction)이 아니라 당시에 화자와 청자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일상의 사물, 사안, 사건 등에 빗댄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청자가 비유를 듣는 순간 곧바로 비유의 내용을 알 수 있고 그럼으로써 강조하려는 주제를 더 확실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 시대와 이천 년이나 시간 공간적 간격이 있는 오늘날의 신자가 비유를 바르게 해석하려면 당시의 문화 관습 역사 종교 등에 관한 정확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비유는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입니다. 비유 자체가 진리가 아니라 강조하려는 주제를 보완하는 내용입니다. 진리란 항상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단순하고 명백해야 합니다. 주님의 비유에서도 강조하려는 주제는 한두 가지 진리로 제한되지 복잡한 내용이 아닙니다.
따라서 해석의 초점과 중요성을 비유에 두어선 안 됩니다. 본문에선 부자는 천국가기 힘들다는 것이 주님이 강조하려는 단 하나의 주제이고, 낙타와 바늘귀 비유는 그 진리를 보충 강조해주는 역할에 그칩니다.
그런데 주님이 너무 과장한, 말하자면 허풍을 뜬 것 같습니다. 당시 제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살펴야 합니다. 고대의 성은 통금시간이 있어서 밤에 문을 닫아버리고 그 시간이 지나서 오는 자들은 성 밖에서 노숙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긴급한 용무가 있는 사람들을 임시로 통과시켜주는 작은 쪽문이, 즉 낙타는 절대 통과할 수 없는, 큰 대문 옆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도 마찬가지였는데 일설에 그 문을 바늘귀라고 불렸다고 하는데 확인된 사실은 아닙니다. 또 그 문의 명칭의 발음이 바늘과 비슷해서 성경저자가 바늘로 오기(誤記)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어쨌든 당시 주님의 이 비유를 들은 제자들로선 성의 쪽문이었던, 문자 그대로 바늘귀였든, 낙타가 통과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쉽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비유가 하는 역할은 단순히 그것뿐이며 또 그것이 그 비유의 뜻입니다.
부자가 천국 가기 힘든 진짜 이유
문제는 예수님이 왜 부자는 구원 받기 힘들다고 말씀하셨는지 그 진짜 의도를 아셔야 합니다. 문맥 안에서의 뜻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부자 청년처럼 돈을 자기 주인으로 삼은 자들이 그것을 포기하고 주님만 따라가기는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목할 사항은 힘들다는 것이지 전혀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어지는 26절과 2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주님은 부자들이 일반적으로 돈을 포기하기 힘들어도 하나님이 택하여서 은혜를 주시면 진정한 회심이 가능하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자기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고 자랑 삼아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단순히 가난하고 비천했다고만 여겨선 안 됩니다. 베드로는 배를 가진 어부였고, 그 처갓집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거점으로 활용될 정도로 큰 집이었습니다. 당시 기준으로는 베드로나 그 처가나 부자에 속했습니다. 부자 베드로는 주님이 택하시고 은혜를 주셔서 구원을 넘어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부자가 구원 받기 힘들다고 말씀하신 깊은 뜻은 모세의 율법과 관계가 있습니다. 율법에는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를 많이 강조합니다. 매년 드리는 십일조 외에 매 삼년마다 구제를 위한 특별 십일조를 드려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안식년과 희년이 되면 모든 부채를 탕감해주고 저당 잡았던 모든 물건들도 원주인인 채무자에게 돌려주어야 하고 종들도 자유롭게 풀어주어야 합니다. 동족끼린 이자도 받지 말라고 명했습니다.
율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뜻은 희년이 되는 매 50년마다 기업을 처음으로 분배 받은 상태로 되돌려서 모든 경제활동을 재개토록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일생과 맞먹는 기간이므로 부의 무조건적 상속을 막아서 모든 이들이 동일한 조건과 기업을 갖고 경제활동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따지면 금 수저를 원천봉쇄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그런 율법을 제대로 준행하면 유대 사회는 특출한 부자가 아예 생길 수 없습니다. 매 세대마다 가나안 정복 후에 땅을 분배한 그 모습대로 부의 공정한 생산 소비 분배가 이뤄지는 것입니다. 원론적으로 유대사회에선 율법을 어겨야만 부의 축척이 가능해집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선 이미 그 자체로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힘들어집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대사회는 이런 희년 제도를 제대로 안 지켰을 뿐 아니라 공평과 정의도 많이 무너졌습니다. 부자들은 아무래도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이 증대되어서 재판이나 경제계약 등에서 자기에게 유리하게 만듦으로써 더 많은 부를 축척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돈을 증식 내지 유지하려면 아무래도 무리한 편법이 동원되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물론 정말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며 그분의 방식대로 돈을 벌고 그분의 원하시는 대로 돈을 소비하는 순전한 부자는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능력만 빌어서 이 땅에서 자신의 안녕 형통 출세를 도모해선 안 됩니다. 그러는 자는 부자 청년처럼 돈을 주인으로 모신 것으로 구원 여부부터 의심해봐야 합니다. 신자는 자신이 현실적으로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반드시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공평과 정의를 바로 세워서 모든 이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합니다.
2019/11/22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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