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신이 죽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님을 압니다. 침입자인 죽음이 우리 운명에 몰래 끼어들었음을 압니다. 우리는 죽음을 이기신 분을 압니다. 주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어떤 차원에서는 죽음이 이미 무장 해제된 적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적 차원 또한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알기에 그것을 훼손하는 죽음, 그것을 더럽히는 다른 모든 오점과 고통, 가난, 야만성, 무지와 싸우는 일을 멈출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세상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이 세상도 더 사랑합니다.
- C. S. 루이스, < C. S. 루이스, 기쁨의 하루>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하나님의 임재의 극적인 변화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관계적 언약을 체결하실 때 그는 그 언약의 일환으로 그들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강림하셨다. 따라서 실제로 하나님은 그의 백성 가운데 거처를 정하셨는데, 처음에는 성막에, 그다음에는 성전에 거처를 두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도입한 새 언약의 일환으로 하나님의 성령은 이제 더 이상 성막 혹은 성전에 거하시지 않고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는 각 사람 안에 거하신다.
- J. 대니얼 헤이즈,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faith working by love)’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전부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의 목적이다. 기독교의 기초는 믿음이며, 그 목적은 사랑이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믿음이 천국에 들어가는 믿음이요, 진정한 기독교로 가는 길이다.
- 김진두, <웨슬리의 행복론>
시편 기자들은 그들 존재 전체를 그들이 아는 하나님께로 가져갔다. 삶이 고통스럽고 견딜 수 없을 때, 도저히 삶을 이해하기 힘들 때, 그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여기서,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음을 주목하라. 그들은 우리가 불평할 때 자주 그러듯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부르짖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가지고 가서 그곳에 서 있었다. 혹은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울고, 궁금해하고, 기다렸다. 나는 우리가 기독교 예배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이유가 바로 우리 자신이 이와 같은 태도를 갖지 않고, 또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는 애가 시편을 무시하고, 모든 사람이 행복하다고, 아니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예배하는 순간에 행복과 기쁨을 느끼지 않으면, 그것을 그 사람이나 그의 신앙에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혹은 사람들에게 실제로 그렇게 말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예배 때 정직해지고 삶의 분투 한가운데서 진심으로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라는 권면을 하지 않으며 그것을 허용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시편들은 정확히 그런 태도를 보여 준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래야 한다.
- 크리스토퍼 라이트, <일곱 문장으로 읽는 구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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