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타계한 고(故) 김기영 권사의 암 투병기 『암 그 후의 삶』이 출간됐다. 책에서 김 권사는 58차례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병마와 싸워나가는 이야기를 진솔하게 기록하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만나며 새로운 삶을 맛본 이야기를 전한다.
의사로부터 췌장암일 것 같다는 소견을 처음 들었을 때,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야, 왜 내가 췌장암에 걸려." 평소 운동도 열심히 했던 터였다. 수술을 받을 수 있는 게 다행이라고 의사는 말했지만, 수술을 준비하는 2주 동안 그의 마음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충격과 예기치 못한 우울증"으로 가득 찼다.
췌장암은 죽음과 가까운 병이었다. 발병 환자의 85%가 6개월 이내에 사망하고, 운 좋게 15%가 수술을 받는다고 해도 예후가 좋지 않아 5년 이상 살 수 있는 환자는 5% 미만이라고.
의사는 오래 살면 1년 반 살 거라고 말해줬다. 6개월을 더 보태 데드포인트를 730일로 정해놓고 729, 728... 날을 세며 살았다. 왜 몰랐을까, '죽음은 문 밖에 있다'는 것을. 젊었을 때 죽음은 아주 먼 이야기에 불과했지만, 죽음의 문턱까지 가보니 죽음은 삶과 꼭 붙어 있었다.
언제든지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고된 투병은 마음을 쉽게 지치게 했고, 서러운 울음을 훔치는 나날이 계속돼 갔다.
투병은 고통스러웠다. 퇴원과 입원을 6번이나 반복했다.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들어 입원하고, 혈당 저하로 골절되어, 식도가 막혀, 팔을 움직일 수 없어 입원했다. 항암치료 중에는 목이 쓰려 음식을 삼키기도 힘들었다. 방사선 치료와 항암 주사의 고통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어느 날, 불현듯 교회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되는 절망의 고리를 끊어내고 싶었다. 절망하고 자학했던 날들을 청산하고 그동안 살아온 삶을 혁신(innovation)해야겠다는 다짐이 들었다. 육체는 심하게 병들고 정신은 쇠해갔지만, 이상하게 영적인 갈급함은 커져 갔다.
새벽기도회에 나가 맑은 정신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성경을 읽고, 또 읽었다. 영어성경을 2년에 걸쳐 필사하기도 했다. 그렇게 계속 하나님을 찾는 그를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셨다. 구원의 감격과 동행의 기쁨을 허락하셨다.
하지만 '날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만 드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나를 이 지경까지 만드셨냐"고 하나님을 상대로 원망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원망의 기도조차도 차차 감사의 기도로 바꾸어주셨다.
시인이기도 한 그는 <췌장암에 걸리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췌장암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 절제, 배려의 의미를 깨달았을까 / 췌장암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 부활의 은혜를 체험했을까 / 췌장암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 성령이 인격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 ... 교만과 허욕으로 걸어 온 세월을 뉘우쳤을까."
시한부 판정을 받았던 김 권사는 불굴의 투지로 병마와 싸웠고, 치료 뒤 5년이 지나 완치 판정을 받았다.
그는 "만약 췌장암 수술을 받지 못하고, 성령체험을 하지 못하고, 교회에 나가서 안수를 받지 않았더라면 내 영혼과 육체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상황을 떠올리면 전율하게 된다"며 "췌장암은 내 삶의 프레임을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책에 적는다.
김기영 권사는 이제 하늘나라에 있을 테지만, 그의 삶은 향기로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김기영 권사가 출석했던 서창감리교회 유영준 담임목사는 "글을 읽는 내내 생전의 권사님과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던 소박한 웃음 가득한 티 테이블에 앉아 있는 듯했다"며 고인을 추억했다.
저자는 30년간 학교 교사로 재직했으며, 1991년 문단에 등단하여 시집 『갈잎나무 숲의 소나무』 등을 펴냈다. 서창교회 권사로 신앙생활을 하던 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2019년 소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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