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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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김영한 박사(기독학술원장, 숭실대 기독대학원 설립원장)은 ‘손봉호 교수의 동성애 반대 투쟁 과유불급’론에 대한 비판논평을 전했다. 그는 “대세가 기울어졌다고 패배인가”라고 되물으며 “도리어 남은 자들에게 그루터기 신앙이 요청 된다”고 했다. 김 박사는 “1990년대부터 미국 주류 교회는 퀴어 신학(Queer theology)을 받아들이면서, 동성애가 교회에 틈타 올랐다”며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보기보다 세속적·종교적·문화적 문서로 보면서, 교회가 기독교 영성과 일반 종교의 영성을 혼합한 오류에 빠졌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젠더주의 창시자인 버클리대 주디스 버틀러 교수(Judith Butler)는 ‘성의 구분을 해체하는 것이 여성의 자유를 신장 한다’고 주장했다”며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는 수십 가지의 성을 말했다”고 밝혔다. 또 그는 “버틀러는 동성애자들을 퀴어(Queer)로 명명하고, 그들의 부정적 의미를 희석시켰다”며 “동성애자들을 사회적 약자 프레임으로 묶어, 그들의 주장이 합법성의 차원으로 힘을 얻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흐름 때문에, 그는 “1980년대 헨니 나우웬(Henry Nouwen),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 월터스토프(N. Wolterstorff) 등 미국 복음주의자들 조차 동성애를 비호했다”며 “미국 교회도 동성애를 기독교적 신념이 아닌, 사회적 흐름에 휩쓸려 결국 동성애 합법화를 저지할 동력을 상실했다”고 꼬집었다. 하여 그는 “미국 50개 주 가운데 37개 주가 동성결혼을 합법화 한 실정”이라고 덧붙였다.

물론 그는 손봉호 교수의 말을 일면 긍정하며 “동성애 투쟁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거짓, 탐욕, 우상숭배 등을 제거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며 “정의와 긍휼을 앞세우는 것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는 “목회자들과 성도들 개인들이 제거해야 할 내면적 가시”라고 그는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동성애 투쟁은 개인의 차원에서 국한 돼선 안 된다”며 “동성애가 법제화 차원으로 진행된다면, 동성애 반대 투쟁을 과연 하루살이로 격하시킬 문제일까”라고 반문했다.

특히 그는 “서구 사회의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동성애 비판을 하기만 하면, 형사 처벌까지 가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하여 그는 “동성애 반대는 동성애 합법화와 차별금지법, 반기독교 문화의 법제화를 막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역설했다. 끝으로 그는 “영국과 미국 교회 목회자들은 동성애 합법화와 차별 금지법 제정에 이런 결과가 나올 줄 몰랐다고 증언하고 있다”며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들의 실책으로부터 배워야한다”고 밝혔다.

<“동성애, 전세는 기울었다”는 손봉호 교수의 ‘동성애 반대 투쟁 과유불급’론에 대한 논평>

동성애 반대는 하루살이 걸러내기 아닌, 교회의 본질 지키는 일.(IV)

-세계적 동성애 허용 대세에 교회는 굴복하거나 영적 투쟁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11. 대세는 기울었으나 패배 아니다. 오히려 남은 자들, 그루터기 신앙이 요청된다.

1) 미국교회의 실패: 동성애 허용 및 차별금지법 제정 방관
2015년 청교도 국가 미국의 연방대법원이 동성애를 합법화시킨 배후에는 미국 청교도 정신의
몰락이 있었다. 미국교회가 1960년대 세속의 풍조에 물들기 시작하면서 자유주의 신학과 인본주의 성경관과 신앙관을 수용하여 영적 정체성에 있어서 변질되면서 전통적 청교도신앙에서 떠나게 되었다. 1970년대 80년대 자유주의적 성서비판학이 신학대학과 교계를 지배하면서 성경을 영감된 하나님 말씀으로 보기보다는 단지 세속적 종교적 문화적 문서로만 보면서 교회가 기독교 영성과 일반 종교의 영성을 혼합하는 혼합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성경관에 의하여 1990년대 변태적 성행위 동성애를 교회가 허용하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동성애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퀴어신학(Queer theology)이 나오면서 미국 주류교회는 그나마 가지고 있던 청교도 전통에서 결별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요 레지비언으로서 젠더주의 창시자인 미국 버클리대 비교문학교수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성의 구분을 해체하는 것이 여성의 자유를 신장한다’고 주장하여, 자기 마음으로 생각하는 수십 가지의 성(넌젠더 nonegender(양성 아님), 뉴트로이스 Neutrois(중립성 내지 제3의성), 젠더플로이드 genderfluid, 데미젠더 demigender(절반 성), 폴리젠더 polygender, 바이젠더 bigender 등)을 인정하자고 강조했다. 그녀는 신마르크스주의(네오 마르크시즘, neo-marxism)에 입각해, 동성애자들을 퀴어(Queer)로 명명하고 부정적 의미를 희석시켰다. 그리고 동성애자들을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안에 넣어, 고통 받는 연민의 이미지를 구축시켰다. 여기서 성다수자 대(對) 성소수자라는 이분법적 구조가 나온다.

1980년 미국교회 내부에서 복음주의자들 가운데서도 클락 H. 피녹(Clark H. Pinnock)의 열린유신론(open theism)의 영향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제한을 가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함으로써 복음주의 좌파들이 목소리를 높임에 따라 동성애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헨리 나우웬(Henry Nouwen), 필립 얀시(Philip Jancey),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 월터스토프(N. Wolterstorff) 같은 미국 복음주의자들 조차 동성애를 관용하고, 비호했다. 이들은 “도리어 동성애를 지지하는 크리스천이 동성애 반대하는 크리스천보다 더 순수하고 착하다”는 말까지 했다. 진보 진영이 동성애 운동을 '성소수자 인권' 문제로 부각하면서 정치적 이슈로까지 확대했다. 동성애자는 사회적 소수자라는 프레임 안에서 차별받는 집단으로 분류되면서 동성애를 지지하는 것이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언론 미디어들이 동성애를 긍정적으로 묘사했는데, 여기에 반대하는 교회나 보수주의자들을 이른바 '시대에 뒤쳐진 자들'(those behind times)로 비하(卑下)하기 시작했다. 1969년 스톤웰 항쟁(Stonewall riots)에서 보듯이 동성애자들이 사회적으로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이들을 사회적 약자나 소외자의 관점에서 보는 흐름이 일기 시작되었다. 미국교회는 동성애 문제를 종교적 신념이나 가치 문제로 보지 않고 사회적 흐름이나 양상으로 봄으로써. 미국교회는 동성애 합법화를 막을 수 있는 사회적 지지와 동력을 잃기 시작했다. 미국 50개 주 가운데 37개 주가 동성결혼을 합법화 했다.

이런 역사적 흐름에서 보면, 동성애 반대 운동은 하루살이 제거에 비유할 수 없다. 동성애 반대는 한 개인의 성적 그릇된 욕망에 비판을 가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반대가 더 큰 교회의 거짓말과 탐욕 비판을 지나치고 지나가서는 안된다. 동성애 반대가 동성애 합법화라는 제도적 장치에 대해 투쟁한다면 동성애 투쟁은 단지 하루살이라고 말할 수 없다. 동성애 투쟁은 당연히 우리 안에 있는 낙타, 더러운 욕망과 우상숭배를 제거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정의와 긍휼을 의식하고 앞세워야 한다. 이것은 목회자와 교회가 스스로 투쟁해야할 내면적 가시들이다. 동성애 반대는 동성애 합법화와 차별금지법, 반기독교 문화의 법제화에 그 목적이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동성애 비판하는 교회와 성 다수자들에 대해 법적 제도적으로 제한과 처벌을 가하여 동성애 독재를 하려는 것이다. 영국과 미국 교회 목회자들이 지금 들려주고 있는 것은 동성애 합법화와 차별 금지법 제정에서 이러한 결과가 나올 줄은 미쳐 몰랐다고 그들의 실패를 알려주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들의 실책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2) 대세가 기울었을 때 하나님은 그루터기 신앙 요구
많은 사람들이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고 한탄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포기하지 않는 소수의 남은 자들(the remnants)을 통해 일어난다. 대세가 기울었을 때 그루터기 신앙, 남은 자들 신앙(the faith of remnants)이 요구된다. 우리는 기도에 더욱 힘쓰면서 신앙의 중심을 지키고 교회의 순결성을 지키고, 이 시대의 사회적 성결을 지키는데 기여해야한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교회의 반동성애 투쟁에 희망이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단 12:3) 시대적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이 시대에는 반동성애 투쟁하는 성도들끼리 동지애로서 서로 믿음을 독려하고 사명을 다지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사야 6장 8절-12절은 이스라엘 백성의 강퍅에 대한 예언이 나온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8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9절)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10절)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11절)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사 6:8-12).

이 예언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선지자의 말씀을 듣더라도 이를 깨닫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나중에는 들을 능력까지 상실하게 된다고 예언한다. 이 백성들의 강퍅한 마음은 성읍이 황폐하여 많은 자들이 귀양가게 될 때까지라고 말한다. 이러한 시대적 불법과 불신앙과 배교적 풍조도 하나님의 섭리에 들어 있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러한 ‘이스라엘 강퍅’ 예언에 이어 황폐한 땅을 지키는 그루터기, 즉 남은 자들 신앙, 그루터기로서의 거룩한 씨에 관해 예언하고 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사 6:13). 오늘날처럼 시대적으로 전통적 가치와 윤리가 해체되고 권위와 전통이 붕괴되고 있으며, 진리가 더 이상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는 포스트진리(post-truth) 시대에 하나님은 황폐한 땅에서도 생명력을 가지고 그 땅을 지키는 거룩한 씨(the holy seed), 나무의 줄기와 잎사귀가 다 베임을 당하여도 그 나무의 생명력을 지탱하는 그루터기(stump), 많은 사람들이 비진리와 타협하고 신앙의 절개를 유린당하여 변질된다 하드라도 남은 자들(remnants)이 그 나무와, 땅과 지역과 사회와 나라의 정신과 생명을 살린다. 이처럼 하나님은 오늘날 동성애 젠더주의가 인류문화를 성평등으로 변질시키려 하는 인류문화적 성혁명 시대에 하나님의 창조본연의 성 질서, 결혼 질서와 가정 질서를 남은 자들을 통하여 지키고자 하신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운 도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 평등은 남녀 구별을 해체하고, 선량한 사회풍속을 헤치는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널리 알려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 교회와 그의 성도들의 시대적 사명이다.

3)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다. 대세는 기울었으나 역사의 주관자는 세상 아닌 하나님
아무리 교회가 처한 세상 현실이 어려워도 결국 세상 역사와 전쟁의 성패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안에 있다. 동성애 반대 기독교인들이 이런 믿음을 가지고 각자의 자리에서 영적 전쟁을 치루고 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전해 내려오는 거룩한 전쟁 전통의 사상(the thought of holy war tradition)이다.

구약의 한 실례를 보면 여호사밧 왕이 거룩한 전쟁 신앙으로 연합국 칩입을 물리치는 이야기가 있다. 여호사밧 왕의 유다는 세 왕국(모압, 암몬, 마은) 연합군대에 의하여 공격을 받는 위험에 직면했다. 큰 어려움에 직면했으나 여호사밧은 전쟁을 하나님께 가지고 갔다.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전쟁을 맡길 때 여호사밧의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 되었다.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시어 적군들을 물리치신 것이다. 그리하여 여호사밧의 유다는 살아 남은 것이다.

오늘날 동성애 풍조가 지구촌을 휩쓸고 있으며 세계 35개 국가(2018년 12월 기준)가 동성애를 제도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이 세상의 풍조를 볼 때 대세는 이미 기울은 것 같다. 괜히 진 싸움을 싸울 필요가 없다고 아군(我軍)들조차 우리를 실망시킨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혹시나 이미 끝나버린 전쟁이 아닌가 생각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믿음의 생각이 아니라 사탄이 가져다 주는 생각이고 하나님을 보지 않고 이 세상만을 볼 때 생기는 잡념이요, 불신앙이다.

여호사밧은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았다: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대하 20:12). 이때 여호와의 신이 회중 가운데 레위 사람 아하시엘에게 임하여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 “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대하 20:15). 하나님은 복병을 통하여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사람을 치게 하시어 적들이 혼란에 빠져서 피차에 살육하여 진멸되었다(대하 20: 22-24). 이것이 하나님의 전쟁이다.

오늘 동성애 전쟁도 동성애 풍조와 세속의 권력이 아무리 강하다 하드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성도들이 하나로 연합하여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전쟁이 될 때 반드시 이긴다. 지구촌의 형세로 볼 때 수적으로는 점 점 동성애 허용 국가가 많아 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외면적 형세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영적 형세를 보아야 한다. 한국교회에서는 아직도 복음주의 교회가 대부분이고 강하다. 한국교회 대세는 기울지 않았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다.

미국교회에서도 하와이 광야교회(구 하와이 베다니한인연합감리교회) 한병덕 목사의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그가 속했던 미국교단의 동성애 법제화가 포기되는 예가 있다. 하와이 광야교회는 미국 UMC(미국연합감리교회)에 속했다. 담임목사가 ‘동성애는 죄’라고 설교했다가, UMC총회는 그의 목사직을 박탈했다. 이 말을 해서 교인들 까지 함께 교회 예배당에서 예배드리지 못하게 됐다. 차별금지법에 잠식당해 종교의 자유를 빼앗긴 사례다. 그럼에도 목사들과 교인들은 ‘동성애는 죄’임을 확고히 했다. 한 목사는 감리교신학대와 신대원을 졸업하고 미국 클레어몬트대에서 과정신학으로 석사학위와 목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06년 교회 부임 후 안정적 목회를 하다가 지난해 9월 번듯한 예배당을 뺏기고 연금 혜택까지 박탈당한 뒤 노천에서 예배를 드렸다. 한 목사는 “한국에서도 목회자들이 ‘괜찮다’고 하면서 성경 대신 세상 눈치를 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교회가 사람들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건 맞지만 잘못이 있다면 분명하게 선포하고 구원으로 인도할 사명이 있다”면서 “따라서 구원과 축복의 말씀인 성경대로 믿지 않으면 그것을 얻지 못한다고 분명하게 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감리교에서도 이러한 헌신적인 목회자들이 많은 것은 한국교회의 복이라고 생각된다.

결국 미국 연합감리교회(UMC) 총회에서 동성애 차별금지 법제를 포기했다. UMC는 2019년 2월 26일 세인트루이스 컨벤션센터(America’s Center Convention Complex)에서 폐막된 특별총회(Special Session of the General Conference)에서 최종안으로 상정된 ‘전통 모델’(Traditional Plan)에 대한 표결을 실시하고 찬성 438, 반대 384(53%와 47%)로 통과시켰다. ‘전통 모델’은 동성애 문제를 허용하는 최근의 추세와 달리 그동안 느슨하게 적용돼온 UMC의 불가 입장을 더욱 강화해 스스로를 동성애 관계에 있다고 공언한 사람을 목회자로 안수하는 것과 동성결혼의 주례를 금지하는 법을 어긴 사람에 대한 의무적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 연합감리교의 경우 ‘전통 모델’(동성애 반대)을 주장하는 복음주의자들의 승리라는 반전(反轉)을 보드라도 미국에서 조차 동성애 투쟁이 끝난 것 아니며 복음주의자들이 다시 잃은 지역을 탈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4) 동성애 투쟁은 동성애 전체주의와 투쟁, 하루살이 제거 아닌 낙타 일이다.
차별 금지법이 제정되면 동성애를 비판하는 성다수자의 양심, 표현, 비판의 기본권이 침해된다. 지금 지방자치의회(2019년 7월 경기도의회 인권 조례 발의 등)를 비롯하여 동성애를 인권으로 간주하고 성차별을 금지하는 인권조례가 여러 자치단체에서 시도되고 있다. 그런데 경기도의회가 지난 7월 16일 경기도 성평등 기본조례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개정안은 동성애를 옹호하고 도민들의 기본권과 종교의 자유를 심각히 침해한다며 도민들이 반대해 왔던 내용이다. 그런데 경기도의회가 도민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일부개정안을 상정해 통과시킨 것이다. 개정안의 문제는 경기도 내 기업과 종교단체, 학교 등 모든 ‘사용자’는 ‘성평등위원회’를 설치 운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지난 7월 18일과 20일 두차례 긴급회의를 갖고 ‘경기도민연합’(건강한경기도만들기도민연합)을 조직한 것이다.

경기도인권 조례안 반대집회 참가자들은 “성 평등은 남녀 구별을 해체하고, 선량한 사회풍속을 헤치는 이데올로기”라며 “성 평등을 법제화하려는 이번 경기도 개정 조례안에 단호히 반대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또 이들은 “경기도 조례안은 헌법에 따라서 양성평등 이념을 따라야한다”면서 “이를 무시하고 트랜스, 동성애자 채용을 의무화한 성 평등 위원회 설치를 규탄 한다”고 역설했다.

이런 동성애를 허용하는 지방자치인권조례안이 지방자치의회에서 조례로 확정되면 실제적으로 성다수자의 양심적인 비판과 목회자들과 기독교인들의 복음 전도에 많은 어려움을 초래하게 된다. 그래서 이에 대한 경기도 성 평등 개정 조례안 반대와 개정 집회가 열렸다. 인권 조례에 인종 차별이나 남녀 성차별이나 지역 차별이나 빈부 차별 등은 인권이라는 보편성 범주에 들어가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데 “동성애나 성적 지향” 같은 비인권적이고 매우 주관적이고 자의적이며 성수자라는 특수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조항을 독소조항으로 걸러내어야 한다. 이러한 자그만 사항을 하루살이 제거라고 묵인한다면 우리 한국사회에서도 오늘날 미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다수자들의 엄청난 불이익과 사회적 복음 전파의 어려움을 야기하는 것이 된다.

자유와 인권 연구소장 박성제 변호사에 의하면 오늘날 인권이라는 것이 사상적으로 마르크스적 억압자 대(對) 피억압자의 이분법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인권과 관련된 거의 모든 조례를 검토한 결과, 그 사상적 배경에 '억압자 대 피억압자'라는 이분법이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성소수자, 가난한 자, 학생, 여성, 노동자, 난민 등은 피억압자다. 반대로 성다수자, 부자, 교사, 남성, 고용자, 국민 등은 억압자다.”
그가 말하는 것처럼 인권의 개념을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도식화 하면, 자칫 또 다른 인권 침해를 불러 올 수 있다. 억압자로 규정된 이들에겐 마치 인권이 없는 것처럼, 그들을 역차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엔 서로 상호작용하는 다양한 이들이 있다. 그런 수많은 관계 속에서 우리 각자는 억압자일 때도, 피억압자일 때도 있다. 그저 억압자 대(對) 피억압자라는 단순 이분법 구도로 나눌 수 없다. 그는 “학생인권조례로 인해 학생 지도에 어려움을 토로하는 교사들을 많이 보았다. 그럴 때마다 스승과 제자가 있어야 할 학교에 억압자와 피억압자만 남게 된 것 같아 마음이 매우 슬펐다."고 피력하고 있다.

이미 구체적인 사회적 우려가 집중된 한동대와 숭실대의 동성애 학생 징계에 한국인권위의 “징계 무효” 권고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정하는 차별금지법이 통과될 경우, 법적 구속력을 발휘하여 기독교 사학의 자율성이 국가권력의 간섭으로 훼손되게 되는 것이다. 지금 각 지방도의회가 국가의 NAP성평등정책에 따라 이러한 독소조항을 모르고 동성애 인권사항을 일반 인권사항에 집어 넣어 보편적 인권사항(인종, 지역, 신분, 학력, 빈부, 종교, 성별 등)과 자의적 인권사항(성적 지향)이 혼동되고 있는 것도 지적되고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차별금지법 제정과 지방자치단체의 인권 조례 제정 등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 사회에서 동성애 반대자가 동성애 비판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동성애 독재 전체주의(totalitarian homosexual dictatorship)로 나가는 것이다. 동성애 독재와 전체주의가 우리 한국사회도 오늘날 미국이나 유럽사회가 당하는 사회적 역차별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으며 이로 인한 전통교회의 피해는 실로 엄청난 것이다. 성평등 정책이 추구하는 각종 인권 관련 조례나 차별금지법 제정과 같은 일련의 시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가정 해체요 동성애자가 특권을 누리며 이에 대한 비판자들은 역차별을 받는 것이다. 박성제 변호사도 필자와 같은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네오 마르크시즘에 기초한 가정 파괴다. 양성과 이성애의 근간을 허물고, 낙태를 허용하며, 급진적 페미니즘으로 남녀 갈등을 조장하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순결보다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르치면 끝내 가정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럼 그 빈 자리는 국가가 채우게 된다. 가정이 했던 사소한 일들에까지 국가의 손길이 미쳐야 한다. 국가는 '빅 브라더'가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래야만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유토피아적 사회가 될 것이라 믿겠지만, 역사는 그것이 전체주의로 나아갔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동성애와 차별금지법 제정, 성적 지향 독소조항 제거를 위하여 투쟁하는 것을 하루살이 제거요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고 말하는 것은 현실상황과는 너무 거리가 먼 생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그동안 동성애 대책위가 해온 다음과 같은 일도 사소한 일이 아니라 낙타를 잡는 큰 일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헌법개정안에서 개정특위가 양성평등을 성평등으로 개정하려는 것을 사전에 막았다.
2017년 젠더를 헌법에 넣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2018년 개헌특위는 성평등 조항을 신설하고자 하였다. 헌법 36조의 양성평등 조항을 지우고자 하였다. 지난 2018년 개헌특위는 헌법 36조에 양성평등을 성 평등으로 바꾸려 했는데 초안에서 그것을 제지하는 일을 동반연과 동반교연 등 대학교수들이 해당관청 앞 건물 앞에서 농성하면서 행동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되었겠는가?
둘째, 부천시가 젠더마을까지 조성하려 했지만, 시민들이 힘을 모아 완전 삭제를 이끌어 냈다.
부천시의회가 2019년 7월 현행 조례안에 제16조의 2 성평등전문관의 운영 들을 신설하고자 했다. 이 조례는 성인지 강화 및 성주류화 확산을 위해 성평등 정책을 전담하는 성평등전문관을 설치한다는 취지다. 당초 부천시는 문화다양성 조례 신설을 추진하면서 젠더 전문관이라는 직책을 신설하고자 했었다. 이에 대해 부기총(부천시기독교총연합회)과 65개 시민단체들이 거세게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성평등 전문관을 신설한다는 내용을 담은 제 16조 2조례안은 삭제한채로 개정안이 가결되었다. 이처럼 기독교 동성애 대책위는 경기도 의회 등 지방 자치단체에서도 제 3의 성, 젠더를 적용한 조례안(젠더 법안) 철회시키고자 투쟁하고 있다.
셋째, 대책위는 군대내 동성애(항문성교)를 금하는 군형법 92조를 수차례 삭제하려는 시도를 막아내었다. 동성애를 받아들이는 나라와 군대는 오합지졸 될 것인데 에스더기도운동이 군형법 개정을 막아내었다.
넷째, 대책위는 에이즈 감염의 주 원인인 남성 동성애 대책을 보다 제도적으로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에이즈치료비 국가부담으로 인한 동성애방지 무대책에 대해 정부에 항의하고 있다. 에이즈 치료비만 한 달에 600만 원인데, 이를 국가가 100% 지원해 주고 있다. 동성 간 성관계가 에이즈의 주된 경로인데, 스스로 타락한 성관계를 통해 얻은 에이즈를 국가가 지원 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인가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5) 목회자들은 주일 대예배 시 ‘동성애가 왜 죄 인지’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2019년 7월 16일 경기도의회가 도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평등기본조례 일부개정안을 통과시킨 것과 관련하여 이 지역에 위치한 새에덴교회의 소강석 목사와 우리들교회의 김양재 목사가 지난 7월 21일 주일 대예배에서 차별금지법을 우려하는 기도와 설교를 전한 것은 개혁신앙을 가진 목회자로서 시의 적절한 조치라고 말할 수 있다.

김양재 목사는 “오늘날 우리는 나봇처럼 말씀에 순종하는 순교자가 되도록 도우소서”라며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지 않도록 도우소서”라고 기도했다. 왕상 21:1-16에서 아합 왕이 포도원을 돈으로 사려고 했지만, 나봇은 “여호와께서 금하셨다”며 끝까지 거부했다. 그러자 나봇은 이세벨의 궤계로 돌로 쳐 죽임 당했다고 나봇의 순교자적 태도를 강조했다.

소강석 목사도 “경기도 성 평등 개정 조례안을 비판”하면서 “경기도에서 이런 성 평등 조례 개정안을 통과 시키니까, 전국 시·군 광역시가 다 이를 이행하려한다”고 지적했다. 소 목사는 마태복음 23:24에서 빌려온 “동성애라는 하루살이와 싸우느라 정의와 긍휼을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면 안 된다”라는 발언의 뜻은 하루살이 같은 동성애 때문에, 우리 안의 낙타 같은 죄를 외면해서는 안 됨을 말한 것 같다”고 전했다.

한국 교회는 영국·미국 교회 목회자들의 전철은 밟아선 안 된다. 동성애는 “하루살이가 아니라 낙타와 같은 죄의 욕망”이며 우리안의 죄의 욕망 투쟁과 동성애 합법화라는 사회적 제도화 측면 투쟁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당시 미국교회는 소수자 인권이란 미명으로 동성애 지지 운동을 진행했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를 들먹여, 동성애자들에게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리하여 미국교회는 정부가 동성애를 합법화하고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도록 방관하여 지금 많은 건전한 시민들이 역차별을 받도록 하고 있다. 동성애의 사회 제도화 측면 투쟁을 미쳐 방관한 것이다. 소수자 인권보호라는 논리에 휘말려 수수방관한 것이다. 미국에서의 이런 실패의 역사를 안다면 동성애 반대를 단지 개인인 윤리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윤리적 차원애서 접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김양재나 소강석 목사가 지적하는 것처럼 목회자들은 동성애가 잘못됐음을 교회에서만 아니라 인권 조례를 작성하는 오늘날의 빌라도인 고위 공직자들(청와대, 국회, 법원, 경찰 등 국가기관의 공무원들)을 향해서 충언할 수 있어야한다.

동성애가 죄라는 것은 일반 윤리가 말해주지 않는다. 동성애는 윤리학자나 일반종교가 그 실상을 바르게 진단할 수 없고, 오로지 인간과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주신 성경만이 동성애가 창조질서에 위배된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알려준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목회자만이 동성애가 죄라는 사실을 하나님 말씀이요 계명으로 전파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 목회자들의 설교를 통하여 차별금지법의 폐해 사항을 알게됨으로써 많은 기독교 공직자들이 인권 조례에 성적 지향이나 동성애 같은 독소조항을 넣는 것을 방지할 수 있고, 관공서, 경찰, 법원, 국회에서 동성애 이슈가 나올 때 단지 일반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의식을 가지고 이를 실무에 반영할 수 있다.

맺음말
이상에서 면밀히 성찰해보면 손봉호 교수의 근본적 주장은 오늘날 헌신적으로 동성애 반대 투쟁하는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의 주장과 크게 다른 것이 없다. 전략의 차이다. 차이란 많은 경험을 가진 원로로서 그는 동성애 싸움을 하루살이 걸러내는 것으로 보고 여기에 힘을 지나치게 허비하는 나머지 낙타라는 교회의 우상숭배(세습, 각종 권력욕 추구, 부정 부패 추구) 타파를 지나칠 것에 대해 우려하는 것이다. 그의 우려를 충분히 수용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중요하다. 이러한 전략적 사고에 동의를 하면서도 필자는 단지 “동성애 반대는 하루살이 걸러내는 것”으로 보는 것에는 동의하지는 않는다. 동성애 이슈는 단지 하루살이 걸러내는 사소한 일이 아니다. 동성애 이슈에는 성경관, 구원관, 성화론 등 신학적 관점이 내포된다.

동성애 이슈는 2014년 별세한 세계적인 지성인 독일의 보편사신학자 판넨베르그 교수가 지적하는 바 같이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본질에 관련된다는 것이다. 그는 “동성애를 받아들이는 교회는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할 수 없다”고 천명하고 있다. 세상은 동성애 풍조를 따라가드라도 예수 그리스도교회는 이에 따라갈 수 없다. 동성애 풍조에 물들지 않고 자기를 지키는 것은 세상과 다른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표지이며 하나님 백성된 신자의 표지이다.

유다서의 말씀은 특히 오늘날 동성애 풍조 속에 살아가야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침이 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17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18절)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19절)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20절)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21절)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22절)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유 1:17-23).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시대적 풍조인 동성애 죄(성중독)에서 사도적 신앙으로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동성애 성중독은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동성애자들은 우리의 이웃이요 동료로서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고,” ”불(동성애 중독)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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