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동물 에게는 본능 이라는 것이 있다. 본능은 후천적으로 배워서 터득하는 것이 아 니고 태어 날 때부터 가지고 오는 성질이나 능력을 가리킨다. 갓난아이에게 젖꼭지를 빠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된다. 본능이기 때문이다.
싸우고 욕심 부리고, 속이는 것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아이들은 잘 하게 된다.
왜 그럴까? 인간은 태어 날 때부터 타락한 본능 가지고 태어낫기 때문이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원죄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은 절망적인 존재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타락하기 이전의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대로 지어진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다. 따라서 인간의 내면의 깊은 곳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죄라는 더러운 껍질에 둘러 싸여서 잘 나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회복 할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일깨워 주고 있다.
오직 한분을 통하여 우리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본문 12절과 21절에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첫째는 그로 인하여 죄기 세상에 오게 한분이고 둘째는 그로 인하여 세상에 ‘의’ 가 오게 한 분이시다. (12절) 세상에 사는 사람은 모두 이 한 사람의 후손이다.
이 한 사람처럼 우리 모두가 죄를 지었고 사망이 모든 사림에게 이르렀다. 그래서 한 사람의 비중은 크기 마련이다. 오늘 본문은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한 사람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는가를 알려 준다.
창세기 2;1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다
이 말은 죽지 않도록 인생을 만들었는데 불순종 할 때는 죽음이 올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 그대로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인류에게 적용되고 있다.
세상에 죽지 않는 사랑은 없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한 사람 으로 말미암아‘라는 대목 이다.
아담과 우리의 관계를 이해해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구원을 이해 할 수 있다.
아담은 개인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사람으로 불리며 인류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아담의 의미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에서는 마지막 아담 이라는 표현을 썼다.
한 사람의 범죄로 전 인류가 죽게 됨(롬 5:12)
한 사람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적 사랑이 전 인류를 구원 함
한 사람의 대속으로 모든 인류가 죄인이 살게 됨 (롬 5:15)
이 한 사람의 대표적 인물이 아담이다.
어떤 분은 아담이 죄를 지었는데 왜 나까지 죄를 지어야 하냐고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언젠가 죽는다고 생각하면 무언가 아담과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짐작 할 수 있다. 창세기 2;17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선악과를 두었나를 우리는 본다. 창2:9 말씀하시었다. 선악과를 먹으면 정령 죽으리라. 생명과를 먹으면 영생(창3:22)하리라고 말씀 하셨다. 영생은 의롭게 되어 천국 가는 것이요. 죽음은 죄를 지어 지옥 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담이 둘 중에 하나를 택하는 것이었다. 의를 택하든 죄를 택하든 자유이다. 아담의 선택에 모든 것을 맡기었다고 해서 이를 신학에서는 행위 언약이라고도 한다. 아담의 행위를 두고 하나님은 언약을 약을 맺으신 것이다.
이제 아담은 선택만 남았다 이를 위해서 그는 바른 선택, 바른 판단을 하는 것이다.
아담은 결국 선악과를 택하고 그 결과 죄가 들어오고 사망이 들어왔다. 그리고 아담의 후손 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죄가 들어오고 사망이 들어왔다.
자신의 행동으로 의로운 사람 되어 천국에 갈만한 사람은 없다.
죄로 오염되어 있고 부패 된 인간은 그 누구도 선한 열매를 맺을 육체는 없다.
가시나무가 포도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엉겅퀴가 무화과를 맺을 수 없다(마7:16).
인간의 마음과 영혼 그리고 육체와 생각이 다 죄의 종이 되었다. 인간은 전적으로 어떤 선 도 행할 수 없으며 언제나 악한 경향으로 그 성품이 향하여 있기에 하나님을 향하여 한걸음 도 옮겨 갈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여 눈 한 번도 떠 볼만한 영적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그대로 두면 인간 에게는 사망만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은혜는 아담의 범죄와 같지 않다.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의 은혜로 인해 주어지는 선물은 더욱 많은 사람에게 넘기게 되었다(15절)고 한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선물로 이것은 아주 값진 은혜이다. “또한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인해 정죄에 이르렀으나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은사는 많은 범죄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르게 된다. 아담 한 사람으로의 범죄로 인해 죽음이 바로 그 한사람을 통해 왕 노릇 했으며 은혜와 ‘의’ 의 선물을 넘치도록 받는 사람들은 한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할 것이다(16-17). 아담으로 일어난 일과 예수님으로 일어난 일이 대조 된다.
이제 우리는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게 되었다. 우리 에게는 선택을 통해 생명의 능력 가운데서 죄를 짓지 않고 왕 노릇 할 수 있는 권세가 주어졌다.
로마서에는 이것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차례 반복 한다.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처럼 한 사람의 의로운 행동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 (18-19) 넘치는 은혜라는 말이 감동적이다. 17절에 은혜의 선물을 넘치도록 받았다.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있을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해 심판과 진노보다 하 나님의 의의 선물이 더욱 넘쳤다는 것이다. 죄 가운데 빠져 방황하는 것보다 더욱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 졌다는 것이다.
쓰러지고 넘어 질 지라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선물은 언제나 우리의 것이다. 그 은혜는 넘치고도 넘친다.
죄가 우리를 넘어 뜨려도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일어 설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절망의 나라에서 소망의 나라에 이르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21절에서 절망의 나라에서 소망의 이르렀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과거에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하였다.
우리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이전에는 죄가 우리를 지배하였다. 오늘 본문에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사망의 권세를 휘두르면서 우리를 괴롭혔으나 이제는 다르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 우리는 이제 은혜의 나라에 살고 있다.
소망의 나라 살고 있다.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지배 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더욱 넘치는 은혜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나 같은 죄인까지도 버리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살리시고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 것 자체가 은혜가 아니고 무엇인가?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 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만 해도 가슴에 감격이 오지 아니 할 수 없다.
왜 그럴까 우리는 죄의 나라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더욱 넘치는 은혜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 그것뿐인가?
오늘 본문 21절을 보면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이 있다.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죄는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 한다. 왜 그럴까? 우리는 사망에서 벗어나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망을 향해서 담대하게 호통을 칠 수 있게 되었다.
고전 15:55절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하노니.
우리는 더 이상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 에게는 이미 영원한 생명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장차 빛나고 높은 보좌에 계신 주님과 함께 그 나라에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마 암아 생명 안에서 세세 무궁토록 왕 노릇 하는 신분으로 완전 뒤 바뀌었다.
더 이상 우리는 절망의 나라에서 살지 않는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성이나 성품 이라는 잣대로 구원 여부를 결정 한다고 할 것 같으면 누가 그 기준을 통과해서 구원을 밭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부족한 것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그러한 우리의 고민과 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그를 믿고 시인하면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로운 자로 간주해 주시겠다니 얼마나 감격한가?
여러분 우리는 돈이 많아서 이거나 권세가 많아서 아니다. 권세를 자랑하다가 망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잖은가?
그렇다고 가정이 화목 하면 행복할까? 일시적으로 그럴지는 모르지만 영구한 것도 아니다. 믿음이 없는 행복은 인간적인 것이요 길어야 이승뿐이다.
믿음이 있는 것이 영생임을 고백 하자.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믿음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인의 자리에 않게 하고 영생의 선물을 받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공의로우신 선물은 누구 에게나 거저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귀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게 하셨다. 하나님은 비싼 값을 치르시고 구원을 사셨지만 우리 에게는 거저 주신다. 어짜 넘치는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사랑 때문에 구주가 우리 대신 죽으셨네.
왜 날 사랑 하나 하나님은 우리의 됨, 됨이 때문이 아니라 그 분의 성품 때문에 우리를 사랑 하시네 시험 닥치고 내 마음 낙심될 때 고통과 슬픔의 끝이 보이지 않을 때 나 주님 앞에 나아 가 빈다. 평안과 기쁨 얻기 위함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5:11) 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영생을 맛보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리라 다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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