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한반도 정세는 급변하고 있다. 남과 북의 정상이 수시로 판문점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나, 서로를 죽일 듯이 으르렁거렸던 김정은과 트럼프가 서로 손을 마주잡고 환하게 웃는 사진을 보게 될 줄이라고는 작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하기 어려웠던 모습이다. 특히 북한이 그동안 한반도 평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핵폐기를 조건으로 대화에 나선 것 획기적인 일로 평가된다. 여전히 많은 전문가들이 북한의 꿍꿍이가 무엇인지 의심이 남아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변화가 한반도의 평화와 더 나아가 통일로 나아가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지 않을까 하고 많은 이들이 기대하고 있다.
이러한 외교적 변화로 인한 착시 현상 때문인지 그간 최악의 독재자로 악명을 떨쳤던 김정은도 정상회담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있다. 국제 외교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핵을 과감히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고 자신의 정권의 생존 보장을 요구하는 모습에 대해 국제사회는 적어도 이전에 가진 편견, 즉 북한과 김정은은 말이 통하지 않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통제 불능이라는 생각을 조금씩 수정하는 듯 하다.
많은 성도들에게 현 상황은 반가우면서도 혼란스럽다. 한반도 평화에 진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협상 대상인 김정은 정권에 대한 불신이 뿌리깊기 때문이다. 또한 정치적으로만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을 뿐 북한 내의 주민들에 대한 과도한 통제, 강제 송환 탈북자들에 대한 인권 유린, 정치범 수용소 운영 및 기독교 박해 등의 행태는 변함이 없다. 그러다 보니 북한 정권과 제대로 된 협상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최근의 북한의 전향적 태도도 정치적 쇼로 진단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전쟁과 분쟁이 가져올 엄청난 비극을 생각한다면 결국 문제해결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북한과의 대화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성경적으로 볼 때 우리는 작금의 상황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이 글에서는 현 남북 관계와 한반도 정세와 관련한 고민을 찬찬히 나누면서 정의와 평화를 향한 우리의 태도와 장기적인 비전을 고민해보고자 한다.
평화학의 창시자 요한 갈퉁 (Johan Galtung)은 평화를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로 분류했다. ‘소극적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강대국들간의 힘의 균형이나 거대 제국에 의해 전쟁이 성립하지 않는 상태도 평화로 보기 때문에 현실주의적 관점의 평화로 일컬어진다. 반면 ‘적극적 평화’는 구조적 폭력이 없는 상태이다.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을 넘어서 압제와 착취가 중단되고 폭력적 구조가 해체되는 것을 평화라고 본다. 즉 정의가 함께 하는 평화가 진정한 평화라는 것이다.
적극적 평화와 한반도
성경에서는 평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정의가 바로서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시도록(마 6:10) 기도하라는 주님의 가르침과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암 5:24) 하라는 선지자의 교훈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평화는 공의로워야 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성경이 말하는 공의는 단순한 개인의 윤리뿐 아니라 고아와 과부로 대변되는 약자들을 돌보는 사회적인 측면을 포함한다. 개혁주의 지성인 니콜라스 월터스코프 (Nicholas Wolterstorff)는 그의 저서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때까지’에서는 정의란 진정한 평화를 뜻하는 ‘샬롬’의 전제조건으로서 고통받는 자, 소외된 자, 억압받는 자’에 대한 관심을 의미하며 ‘진정한 평화’를 위하여 다가가는 수단이 된다고 보았다. 아담의 타락과 함께 동반 타락한 사회 구조의 질서에 대하여 기독교인은 무한 책임을 가지고 그 사회질서의 변혁에 참여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우리가 한반도 평화를 이야기할 때에도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평화’, 또 평화학에서 이야기하는 ‘적극적 평화’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넓게 보면 한반도의 분단과 군사적 대치 상황 자체가 불완전한 평화이고 그 안에 폭력적인 구조가 존재한다. 전쟁은 중단되었지만 여전히 국경을 사이에 두고 수백만의 군대가 배치되어 있고 특히 북한은 핵을 통해 주변국을 위협하고 자신의 이익과 생존을 보장하고자 한다. 비록 전쟁은 중단된 상태지만 진정한 평화에 이르지 못했다.
북한 내에 만연한 구조적 폭력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김씨 정권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백성들의 자발적인 지지를 얻는 도구로 분단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김병로 교수는 북한 체제가 한국 전쟁 이후 외세의 침략에 대응하고 생존하는데 역점을 두고 지역자립체계를 바탕으로 한 병영국가로서 기능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북한 정권은 분단 상황을 이용하여 병영적 국가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미제 원쑤에 대항하고 남조선의 억압받는 대중을 해방시키기 위해 위대한 어버이 영도자 아래 단결해야 한다’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명제를 바탕으로 종교적인 주체사상을 주입하고 반대 세력을 탄압해왔다. 여전히 10만명 이상 수감되어 있다고 파악되는 정치범 수용소와 강제 송환된 탈북자들이 겪는 고통은 현재 진행형이다. 특별히 기독교에 대한 심각한 박해가 계속되고 있다.
관여 전략을 통한 한반도 평화
그렇다면 우리가 평화를 위해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평화롭지 못한 구조의 타파를 위해서는 북한의 내외적 변화가 필요하다. 먼저 넓은 관점에서 한반도 분단의 가장 큰 화두라면 단연 북핵 문제이다. 대부분의 전문가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적절한 관여와 교류가 필요하다고 분석한다. 미국의 강경 매파적 입장을 대변하는 빅터 차 조지타운대 교수와 온건 비둘기파 데이비드 강 남가주대(USC) 교수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전략에 대해 논하면서 북한을 바라보는 관점은 다르지만 방법적으로는 북한에 대한 관여, 즉 북한과의 대화와 교류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데이비드 강 교수는 북한에 대한 조건 없는 관여가 북한의 변화를 촉진한다고 보았다. 북한이 외부세계에 문을 더 열도록 조건없이 북한과 교류할 때 북한 내에 자본주의적 가치가 보편화되고 국제적인 규범이 공유되고 국가적, 사회적 변화의 흐름이 강해진다고 분석했다. 즉 북한과의 화해, 협력, 교류가 북한을 바꾸는 실질적인 방법이 된다는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은 상황이더라도 북한과 조건 없는 대화와 교류를 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빅터 차 교수는 화해, 협력, 교류 자체가 북한을 변화시키는 동력이 된다는 점에는 회의적이다. 다만 북한에 대한 관여는 여전히 필요하다고 보았다. 봉쇄와 제재로 북한을 바깥 세계와 완전 분리시키고 계속적인 압력을 가한다면 북한이 어떤 극단적인 선택, 즉 테러나 군사도발 혹은 전쟁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한이 극단적 선택을 할 때 이미 외부세계와 분리된 상태인 북한에게 외교적인 제지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문제도 있다. 그렇지만 북한에 대한 관여가 있었다면, 다시 말하면 북한이 외부세계와 교류하면서 이익을 얻고 국가 경제가 외부 세계와 긴밀히 연결되기 시작한다면 북한이 극단적 선택을 할 가능성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북한의 움직임을 일정부분 제어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북한에 대한 관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북한과 무조건적인 교류가 아닌 핵포기를 조건으로 한 관여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북한의 내부적 변화라는 측면에서도 이러한 방법론은 유효하다. 북한과의 경제 협력이 활발해지고 남한 및 외국계 기업이 다수 진출, 투자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국가들은 법률 체계가 잘 갖춰져 있지 못하다. 법률이 아닌 지도자와 당의 지침에 따라 사회를 운영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국과의 경제 협력이 본격화되면 지도자의 유훈이나 높은 관리의 말 한마디로 정책을 결정하기 어렵다. 법률과 제도 등 소프트 인프라도 해외 투자 유치에 중요한 요건이 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종교적, 교조적 통치에서 법에 의한 통치로 통치 스타일이 변화될 가능성이 높다. “햇볕, 장마당, 법치 – 북한을 바꾸는 法”의 저자 이종태씨는 개성공단 등 이전의 경제협력이 북한의 법에 의한 통치를 더욱 촉진하는 효과가 있다고 분석했다.
북한과 외부세계와의 경제교류 활성화도 북한 내의 사회 변화를 자연스럽게 촉진한다. 경남대 임을출 교수는 북한의 경제 변화를 분석하면서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북한의 상당수 주민들이 사적 행위와 재산권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체제 변화를 원하고 있으며 열악한 금융 시스템에 대한 요구도 높다고 보았다.
이러한 민중의 요구가 높아진다면 기존 통치 방식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경제 교류는 자연스럽게 인적 교류와 외래 정보 유입으로도 이어진다. 그간 북한은 주민들에게 강력한 정보 통제를 실시해왔다. 그러나 고난의 행군 이후 장마당을 중심으로 중국을 비롯한 외부 세계와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외부의 정보도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갔다. 한국의 드라마와 방송 프로그램이 젊은 계층에게 문화적인 영향력을 끼칠 정도로 정보 유입과 확산은 광범위했다. 비록 북한 정권이 최근 강력한 주민 통제와 처벌로 이를 억제하고 있지만 외부세계와의 교류의 문이 더 활짝 열린다면 북한 정권은 기존의 통치체제의 한계를 더 절실히 느끼게 될 것이다.
헬싱키 협정의 교훈과 인권 문제
교류와 협력을 통한 북한의 자연스러운 변화를 유도하는 방안만이 전부는 아니다.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잘못되었다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북한의 진실성 있는 변화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북한과의 대화와 협상을 이어가는 가운데서도 북한 인권 문제를 제기하고 인권 개선 관련 활동을 이어가야 한다.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공사의 책 ‘3층 서기실의 암호’는 실제 북한이 인권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부분을 외교적인 측면에서 잘 묘사하고 있다. 미국과의 효과적인 외교를 위해 유럽 국가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자 많은 시도와 애를 써왔지만 번번히 유럽국가들이 제기한 인권 문제가 장애가 되었다는 것이다7). 이를 타개하기 위해 눈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대화에 나서는 척하기도 하고 전면적인 무시 전략을 시행하기도 했던 북한이지만, 결국 2014년 UN COI 특별보고서 발표 등으로 북한의 인권 유린 행태가 전면적으로 국제사회에 부각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북한이 인권 문제를 무시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주민들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을 유지하고 외부 영향을 차단함으로써 종교적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현재 북한은 핵 폐기의 대가로 체제 보장을 요구하며 미국과의 협상에 나서고 있다. 북한 입장에서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개발한 핵이니만큼 아무 대가 없이 순순히 핵을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북핵문제가 제대로 해결되고 분단 상황이 바르게 종식될 수 있다면 북한의 요구를 일정 수순 수용하는 것이 정치적인 해법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북한 체제의 생존을 보장한다는 것이 북한 정권이 저질러온 불법을 용인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이런 관점에서 동서간의 다자안보체제 수립의 일환으로 진행된 유럽안보협력회의 (Conference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 CSCE)와 헬싱키 협정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서유럽의 자유진영과 동유럽의 공산진영은 유럽 내 불필요한 분쟁과 전쟁의 위협을 최소화하고 교류 협력의 기틀 마련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오랜 기간의 협의 끝에 헬싱키 최종 의정서(Helsinki Final Act, 1975)를 승인했다. 이 의정서는 4가지 바스켓(Basket)으로 이루어 있는데 각각 안보, 경제교류, 인도주의적 협력, 국가 간의 국민과 사상의 자유로운 교류 등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처음 헬싱키 협정이 시작될 때는 각 진영 나름의 꿍꿍이가 있었다.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에서는 동유럽에의 소련의 영향력을 공식화하고자 했으며 다른 동유럽 국가들은 서유럽으로부터의 경제적 협력과 지원을 이끌어내고 융통성 있는 외교 정책을 시행하고자 했다. 한편 미국은 동서 화해 분위기를 통해 유럽의 군축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으며 서독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의 경우 동유럽 국가들이 두려워하는 안보 위협의 불안감을 해소시켜 활발한 교류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8). 이러한 각 진영의 의도가 맞아 들어가면서 약 3년여간의 협의 끝에 최종 의정서를 승인했다. 서독을 비롯한 자유진영은 동유럽 국가들에게 안보와 경제협력 부분에서 일정한 양보를 하면서 인권 및 인적 교류를 중요한 협상 결과로 포함시킬 수 있었다. 헬싱키 협정은 국제법적인 구속력이 있는 조약은 아니었지만 각 국가의 정상들에 의해 비준된 정치적인 규제력을 발휘하는 문서로서 공산권 붕괴 전까지 동서 교류의 든든한 제도적 기반이 되어 주었으며 동구권 내 인권 운동을 활성화하고 인권문제에 좀 더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외교적 여지를 넓혀주었다.
유럽에서 이루어진 헬싱키 협정은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북한과의 대화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현재 북핵 문제로 이루어지는 국가 간의 대화는 핵 문제와 북한에 대한 안보 보장 등 안보 분야에 집중되어 있으며 경제 협력 부분에도 일정부분 논의가 진행 중에 있다. 이러한 안보 중심의 대화에 헬싱키 협정과 같이 인적 교류와 사상, 종교의 자유 등 인권 문제도 자연스럽게 포함하여 다룰 수 있다. 북한의 인권 유린에 대한 고발이 계속 이루어지고 이에 대한 국제적 개선 압력이 이어진다면 한반도의 헬싱키 협정과 같은 인권 개선 내용이 포함된 협의가 꼭 불가능하지는 않다. 물론 아직 핵문제 해결의 진전이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북한과 대화에 참여하는 미국이나 남한이 인권 문제를 강력하게 제기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기존 UN COI 보고서 등을 통해 북한의 인권 유린이 국제적인 화두로 이미 급부상한 만큼 북한이 자신들이 원하는 국제사회의 지지와 인정을 위해서는 인권 개선 노력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국제사회의 여론 등을 통해 강하게 압박한다면 국가간 대화에서 관련 주제가 자연스럽게 다뤄질 수 있고 북한이 자신의 정책을 바꿔 나갈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게 될 것이다. 계속적으로 북한에게 종교적이고 교조적 체제 하의 주민 통제와 인권 탄압은 오히려 정권에 득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일깨우고 북한이 관련 정책 개선과 통제 완화로 갈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남북 화해 분위기에 편승하여 용서와 화해를 새로운 한반도의 가치로 부각시키기도 한다. 성경의 용서를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빗대어 북한 문제에 있어서도 무차별적으로 용서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지만 이는 바른 용서의 태도라고 보기도 어렵고, 정의를 세우고 진정한 평화를 구축하는 일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 수년 전 영화 ‘밀양’이 기독교계에서는 화제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기독교적 용서가 어떻게 잘못 이해되는지에 대한 비판이 영화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용서, 속죄와 구원에 대해 많이 배우고 들었지만 정작 제대로 된 이해가 없었던 우리의 모습을 지적하는, 피해자는 생각하지 않는 가해자 위주의 용서로 전락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되묻는 영화였다. 우리가 북한에 대해 용서를 이야기할 때 같은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용서는 먼저 진실을 직면하고 인정할 때 가능하다. 또 용서의 주체도 현재도 계속해서 북한 정권의 폭력 아래 신음하는 이들이 주된 피해자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남한의 우리가 어줍잖은 용서를 이야기하는 것은 위험한 접근이다.
진정한 용서를 위해서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준비되어야 한다. 가해자는 반성과 회개가, 피해자는 용서를 위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용서를 이야기하기 앞서 그 과정을 진행해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독일도 잘즈 기터 중앙기록보존소 운영을 통해 인권 침해 기록을 정리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서독 정부는 전체 독일인에 대한 보호 의지를 천명함은 물론 이후 체제불법 청산 과정에서 유용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현재 UN의 북한 인권 센터와 남한이 북한 인권법을 통해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북한인권기록소 등의 활동은 계속해서 활발하게 전개되어야 한다. 북한과의 대화의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지래 겁먹고 인권 활동을 소홀히 하는 것은 매우 근시안적인 처사다. 오히려 북한의 인권침해 행적이 잘 기록되고 정리되는 시스템이 제 기능을 할 때 북한 정권이 이후에 자신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인권문제가 불똥이 튀지 않도록 정책과 행동을 주의하고 개선하도록 동기부여 할 수 있다.
결론: 북한 정권에 대한 명확한 입장과 장기적 안목을 가져야
분단 이후 70여년의 기간 동안 북한과의 협정이나 대화는 의도한 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남한이나 미국이 협의 내용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북한의 강짜와 일방적인 파기가 두드러졌다. 그간 많은 전문가들은 북한이 핵을 협상 테이블로 가지고 오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정권 안전 보장을 위해 핵을 개발한다고 생각했을 때 핵 무기 개발 성공 자체가 정권 안정 보장에 충분한 조건이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북한은 핵을 가지고 대화에 스스로 나섰고 한반도 평화에 대한 기대감도 어느 때보다 높다.
그렇지만 외교무대에서 보여주는 북한의 변화가 북한의 근본적 변화를 상징한다고 보기는 현재로서는 무리라고 보인다. 그보다 김정은 정권 유지와 좀 더 큰 야심, 즉 강성대국의 길로 가기 위한 전략적인 선택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여전히 북한은 종교적인 통치 체제를 유지하며 인권을 탄압하고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 만약 자신의 정권 보호에 현 대화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북한은 어느 때라도 원래의 도발적인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북한을 감성적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김정은이 협상장에 나와서 트럼프 미 대통령과 환한 웃음을 지으며 악수한다고 해서 평화가 온 것은 아니다. 북한 체제의 안전을 보장해달라는 북한의 요구에 대해 반응하는 것도 북한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옹호하는 의미가 되어서는 안 된다. 북한 정권의 근본이 여전히 변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한반도의 폭력적 구조를 제거하고 북한의 변화를 독려하기 위한 계기로 이번 대화의 기회를 활용해야 한다. 비록 시일이 걸리더라도 장기적 관점에서 정의로운 평화를 추구할 때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오픈도어선교회 북한개발소식 8월호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