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칼럼] 전통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의 목표는 국가의 간섭과 억압으로부터 개인의 존엄과 자유를 지키는 것이었다. 즉 국가와 개인을 분리시키고 서로를 견제하면서 인간 사회의 발전을 도모했다.
하지만 사회주의자의 목표는 다르다.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국가에 대항하기보다는 기득세력의 도구인 국가를 전복하고 스스로 국가가 되는 것을 1차 목표로 했다. 즉, 피지배 계급이 지배 계급을 견제하면서 공존하는 것이 아닌 피지배 계급이 지배 계급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다. 그들에게 국가의 의미는 권력을 획득한 세력의 지배도구일 뿐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자의 계획이 성공했을 때, 국가의 위치에 앉은 피지배계급은 피지배자들의 전위대이자 대변인이라는 생각 때문에 또 다른 견제세력의 비판을 용인하지 않는다. 결국 이 사회는 지배계급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없어지기 때문에 급속히 전체주의 사회로 변질된다.
개인이 국가를 견제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는 순간 지배계급의 독주가 시작된다. 사회주의 지배계급은 사회의 평등이라는 이상과 비전을 가지고 시작되지만 그 이상을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충분한 권력이 항상 부족하다는 망상에 빠져 결국 그 이상을 실현해보기도 전에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것에만 몰두하다가 멸망한다. 사회주의자의 이상적 이론과 달리 완전한 통합과 평등을 이룩한 사회는 갈등과 견제 속에서 공존하는 사회보다 더 비인간적인 전체주의 사회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사회주의자들에게 가족은 비이성적이며 비인본주의적이고 불평등한 조직이다. 가족은 아무런 합리적인 이유 없이 형성되는 대표적인 조직이다. 재벌 2세들이 갑부로 사는 것은 단지 재벌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이유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빈민가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에도 아무 이유가 없다. 세상은 태생적으로 불평등하며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이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존재하는 사회를 참지 못하고 인간의 힘으로 모든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결국 인간의 이성(理性)과 합리(合理)로 형성되지 않은 가족(家族)이라는 조직이 사회를 지배하는 주요 세력이 되는 것을 사회주의자는 참지 못하여,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회주의자는 가족을 적대한다. 그리고 비합리적으로 형성되는 가족을 해체하고 가정으로부터 분리된 개인을 합리적으로 재조직하기를 원한다.
갓 태어난 아이를 탁아소에 맡기면, 모든 아이는 각기 다른 부모의 경제적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고 각기 다른 부모의 양육스타일에서도 벗어나 모두 평등해진다. 게다가 자신의 부모나 자식일지라도 사회주의 이상을 방해하는 반동질을 하면 가차 없이 상부에 보고하는 것이 가족이라는 비이성적 감정에 휘둘리는 것보다 더욱 합리적인 사회를 만드는 행동이다. 하지만 이런 사회는 어디서 많이 본 듯,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모습이다. 바로, 한반도 북쪽 절반에 위치하고 있는 체제에서 목격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위와 같은 내용은 극단적이고 부정적인 단면만으로 편향된 예시에 불과하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몸을 치유하기 위해 약을 복용하면 질병이 치유되기도 하지만 그 약의 부작용으로 인해 더욱 몸이 약해지는 경우가 있듯이, 위의 실례를 통해,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로부터 발생하는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복용하는 ‘사회주의’라는 치료제의 부작용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한편 자유주의자들에게 가족은 개인에게 신체적 보호, 정서적 만족, 사회적 정체감을 제공해주는 조직이다. 또한 과거 왕정국가가 개인에게 제공하지 못했던 교육과 경제적 기능까지 제공함으로서 국가에 대항하고 견제할 수 있는 개인을 생산하는 ‘인큐베이터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며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조직으로 인정받았다.
구소련의 몰락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의 광풍이 지나가고, 대공황과 같은 자본주의의 부작용이 치료된 후, 경제적 풍요를 어느 정도 이룬 나라에서 사람들은 사회주의자의 경제적 이상인 공산주의 혁명에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또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선거를 통해 지배세력의 교체가 가능하기 때문에, 과거 왕정 시대 때 정치개혁을 위해 사회주의에 열광했던 것과 달리 정치개혁에 대한 열망이 해소되어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매력 또한 약화되었다.
이렇게 현대에 이르러 존멸의 위기에 놓인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 부흥을 위한 새로운 동력을 찾아내야만 했다.
과거에는, 사회주의 개혁을 통해 집권한 사회주의 세력이 사회구조를 개혁하면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개인 권력의 근간인 가정이 억압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시대의 사회주의자들은 가정을 먼저 억압하면 개인의 권력이 축소되고 이를 통해 사회주의 세력의 행동반경이 넓어지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과거 사회주의 개혁의 실패는 사회주의의 실패가 아니라, ‘위로부터의 개혁’의 한계로 인해 공동체 내 모든 개인에게 사회주의적 사고방식이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고, 그 원인으로, 전통적 가정에서 끊임없이 재교육되는 구시대의 의식을 뿌리 뽑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며 개혁 실패의 책임을 개인과 가정에게 전가하는 그럴 듯한 변명을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사회주의 개혁은 과거 가정에서 수행하던 역할들을 하나 둘 국가의 역할로 귀속시킴으로서 가정의 역할을 약화시키고 개인의 국가에 대한 의존을 강화시킨 후, 사회주의세력이 지배세력을 장악하면 아무런 저항이나 부작용 없이 현실 속에 사회주의 이상을 성취할 수 있다는 새로운 사회주의 개혁방법이 등장했다. 과거의 개혁이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면 현대의 사회주의 개혁은 ‘아래로부터의 개혁’이라 부를 수 있다.
그렇다면 가정의 약화를 가능하게 할 도구는 무엇일까? 바로 성적(性的) 방종(放縱)이다. 성적방종은 결국 가정을 약화시킨다. 가정의 근간은 부모 자녀이기보다는 부부이다. 부부관계는 성적 폐쇄성을 통해 강력한 연대를 구축한다. 성적 방종은 부부간의 성적 폐쇄성의 약화를 통해 가정의 유대를 약화시킨다. 혼외정사, 혼전순결의 문제는 단지 성윤리에 머물지 않고 정치적인 문제로 이어진다. 가정의 유대 강화는 가정을 강력한 정치사회세력으로 만들고 이는 국가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견제세력의 형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적자유를 강조하는 것이 마치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유를 빙자한 성적방종은 결국 가정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개인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에 의존하는 개인을 양산한다. 그 중 최근 가장 강력한 도구로 떠오르는 것이 바로 ‘동성애’이다.
때마침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발달은 성적 자유의 범람을 가져왔고 동성애의 확산을 촉진했다. 동성애 세력의 권력은 갈수록 확대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더 많은 자유, 더 많은 권력을 원하지만 한 가지 걸림돌이 있었다. 성적 폐쇄성과 남녀의 결합을 통해 형성된 전통적 가정구조가 바로 그것이다. 결국, 동성애 세력의 확대는 전통적 가정구조와 전통적 인식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한 때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를 견제하는 개인을 생산하여 자유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한 전통적 가정이 이제는 그 자유민주주의 발달로 인해 공격받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처럼 동성애 세력의 목적과 사회주의 세력의 목적이 현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이르러 하나로 일치되기 시작했다. 전통적 가정을 공격할수록 그 두 세력에게는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더 많았다.
그동안 동성애 세력이 추진하던, 전통적 가정구조와 전통적 인식의 해체를 위한 사회 운동은 그 한계가 뚜렷했다. 결국 더 빠르고 강한 사회 개혁을 위해, 국가의 개입이 필요했고 법의 개입이 필요했다. 사실 법치주의는 개인을 통제하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지나친 국가의 개입에서 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것이 바로 법치주의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법을 통해 사회구조를 개혁하고 개인의 인식조차 바꾸는 일이 시작되었다. 서구의 혐오방지법이나 평등법의 근간은 인간의 말과 행동을 교정함으로서 인간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사피어&워프 가설’에 근거한 ‘정치적 수정주의 운동(PC운동)’의 성과물이다. 즉 현대의 법치는 개인을 국가로부터 보호하는 전통적 법치주의 정신에서 벗어나 법으로 개인을 개량 개조하겠다는 사회주의 정신에 의해 변질된 것이다.
동성애 확산운동의 한계를 국가와 법의 통제로 메우려는 동성애 세력은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보완하기 위해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구하다가 사회주의 세력을 만났다. 한편 국가와 법의 강제를 통한 ‘위로부터의 개혁’의 한계를 경험한 사회주의자들은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추구하다가 동성애 세력을 만났다. 그 둘은 첫눈에 반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서로에게 매력적인 존재였고 ‘전통적 가정구조와 전통적 인식의 파괴’라는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움직일수록 그 유대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제까지 우리는 성적 자유를 표방하는 동성애 세력이 왜 자유주의자가 아닌 사회주의자와 손을 잡게 되었는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왜 동성애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은 결과적으로 가정을 파괴하는 길로 가는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우리는 가족주의, 씨족주의의 폐단도 많이 경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정의 달까지 만들어 가정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가정은 국가나 여타의 공동체로도 대체불가능한 공동체란 사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가정을 위협하는 새로운 적들의 의도와 수단들을 정확히 이해하고 대처한다면, 개인의 자유도, 우리의 가정도, 건강한 사회도 안전할 것이다.
■ 건강한 사회를 위한 국민연대(건사연)는 많은 독소조항들을 포함하고 있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시민단체로, 동성애 및 동성결혼, 종교 및 표현의 자유 문제 등 차별금지법과 관련하여 다루고 있다. 블로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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