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네가 태어나던 날 나도 함께 이 세상에 태어났다. 농담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다. 네가 태어나는 순간 나도 아버지가 된 것이니까. 그 전까지만 해도 나는 누구의 아들이거나 누구의 남편이었다. 누구의 아버지는 아니었다. 여자는 아이를 잉태하는 순간, 어머니가 될 준비를 시작한다. 하지만 남자는 다르단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아무런 준비 없이 그냥 아버지가 된다.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가 되는 거지."(33쪽)
"네가 처음으로 혼자 회전목마를 타던 날이 생각난다. 아직 어린 나이였는데도 혼자서 목마를 타겠다고 부득부득 졸라댔다. 아빠는 잠시 망설였지. 하지만 어느새 훌쩍 자라 혼자 목마를 타겠다는 네가 자랑스러웠다."(26쪽)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지난 2012년 먼저 세상을 떠난 딸 이민아 목사를 추모하는 글을 모아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를 냈다.
딸의 출생에 감동받았던 일을 비롯해 시험을 치르면서 경쟁사회로 들어간 딸의 모습을 안타까워하고 혼란스러워한 이야기, 딸의 첫사랑과 결혼식을 보면서 아버지로서 배우고 느낀 이야기, 딸의 투병으로 영혼의 눈을 뜨게 된 이야기 등을 담았다.
이어령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석학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초대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그에게는 따라다니는 직함이 많다. 문학평론가, 에세이스트, 소설가, 희곡작가, 시인 등 문인의 이름 외에도 대학교수, 기호학자, 언론인, 일본 연구가로 왕성한 활동을 했다. 서울 올림픽과 월드컵 등 주요 국가 행사 기획자로도 역량을 펼쳐왔다.
이 책에서는 직함 속에 숨겨진 자연인으로서의 그를 만날 수 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인생을 열심히 살아온 남편이자 아버지, 나아가 할아버지인 이어령의 민낯이 공개된다. 또 이어령이 글을 써온 6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가려졌던 아픔을 끄집어냈다.
이어령의 딸은 유년시절 잠자리에 들기 전 아버지의 굿나잇 키스를 기대하며 서재 문 앞에서 그를 불렀다. 하지만 일에만 몰두하던 그는 딸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이어령은 그 시절을 회상하며 뒤늦게나마 글로써 딸에게 '굿나잇 키스'를 보낸다.
"활명수로 너의 첫 만남을 맞이할 뻔한 아빠가, 네가 떠나고 난 다음에서야 아빠의 자격증을 딴 아빠가 뒤늦은 인사를 한다. '반갑다 민아야.' 이것이 너에게 보내는 나의 첫 굿나잇 키스이다."(43쪽)
"너에게 보내는 오늘의 굿나잇 키스는 결혼시장에 늦게 나타난 것에 대한 뒤늦은 사과야. 너는 얼마나 초조하게 날 기다렸을까. 영영 아빠가 안 나타난다면 어쩌지. 신부 화장을 해서 울 수도 없었겠지. 다시 손을 잡아라. 다시 카펫 위를 걸으며 널 인도하마. 너는 갑옷을 입은 하늘의 신부. 장엄한 결혼 행진곡을 올리거라. 쇼팽의 장송곡이 아니다. 지상의 아버지가 천상의 아버지에게도 인도하는 날. 이번에는 늦지 말아야지 하늘의 신부야."(144쪽)
이어령은 머리말에서 "사람들은 남에게 자기의 우는 모습이나 눈물자국 같은 것을 보여주기를 꺼려한다"며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은 자기 울음소리가 바깥으로 새지 않도록 수돗물을 켜놓고 울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은 마음 속에 개켜두었던 글들이 급기야 이런 책이 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이어 "나는 아직도 내 딸에 대해서 쓴 이 글들이 출판되어 나오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 가시처럼 마음에 걸린다"며 "다만 이 글들이 나와 내 딸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딸을 잃은 이 세상 모든 아버지들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세상 모든 이에게 바치는 글이 되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404쪽, 1만5000원, 열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