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버마 아웅산 폭발사건과 소련의 대한항공(KAL)기 격추사건 당시 정부는 외교활동을 통해 북한과 러시아에 대한 압박을 전개했던 것으로 밝혔다.
정부가 10일 비밀을 해제하고 공개한 '1983년 외교 문서'들에 따르면 1983년 10월9일 버마 아웅산 암살폭발사건이 발생하자 당시 외무부는 북한에 대한 외교적 응징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나섰다.
기본방침은 사건이 북한소행임을 조기에 규명하고 공표하는 것이었다. 미얀마를 상대로는 북한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한국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도록 교섭키로 했다. 미국과 일본, 영국 등 우방국에는 측면지원을 요청키로 했다.
이 같은 방침에 따라 이원경 특사가 미얀마를 방문해 철저한 진상조사와 북한과의 관계단절을 요청했지만 미얀마 외무장관은 북한개입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진상규명 후라야 조치가 가능할 것이라고 대응했다.
외무부는 국제사회를 설득하기 위한 대책도 수립했다. 다자외교차원에선 외교경로를 통한 교섭으로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에서의 북한규탄 결의를 추진했다. 양자외교차원에선 특사파견과 외교경로를 통한 교섭을 통해 각국에 단교, 공관 축소, 공관장 소환, 수교 보류, 인적·물적 교류 동결, 규탄성명 발표 등을 제시하며 이 중 1개 이상의 조치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외무부는 나아가 북한을 외교적으로 응징하기 위한 캠페인을 벌이면서 각국의 호응상황을 살폈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정부의 요청에 호응했지만 일부 국가들은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특히 11월4일 미얀마 정부가 사건이 북한 소행임을 발표하자 전 세계적으로 비난과 비판여론이 비등했지만 북한은 날조라고 주장했다. 중국(구 중공)의 언론은 논평없이 미얀마정부의 발표를 보도했으며 소련 등 동구 공산권은 침묵했다고 외교문서는 전했다.
소련의 대한항공(KAL)기 격추사건 당시 정황도 드러나있다.
1983년 8월31일 대한항공 KE007편(보잉747) 항공기가 뉴욕을 출발한 뒤 앵커리지를 경유해 서울로 비행하던 중 9월1일 오전 3시23분 일본 홋카이도 근방에서 통신이 두절됐다. 조사결과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돼 승객과 승무원 269명이 전원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확인된 통계에 의하면 승객 240명(한국 75명, 미국 61명, 일본 28명, 대만 23명, 필리핀 15명, 홍콩 12명, 태국 6명, 호주 5명 등)과 승무원 29명(한국인)이 탑승하고 있었다.
이에 정부는 진상 파악과 소련에 대한 규탄 여론 조성을 위해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외무부는 9월1일 오전 7시30분 치안본부로부터 KAL기 연락 두절 상황보고를 접했고 오후 7시20분께는 'KAL기가 격추된 것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는 정부 대변인 명의의 발표문을 발표했다.
외무부장관은 같은날 오후 8시30분 주한 미국대사와 주한 미군 부사령관을 만나 미국측의 설명을 듣고 진상규명을 위한 협조를 요청했다.
소련 규탄 외교 교섭이 이어졌다.
외무부는 9월2일 장관 명의의 규탄 성명을 발표했고 전 재외공관에 국제적 규탄여론 조성을 위해 교섭할 것을 지시했다. 이후 전 재외공관에 '주재국 정부가 소련대사를 불러 사실규명을 요청하도록 교섭하라'고도 지시했다.
외무부는 이날 유엔 헌장 35조 2항에 의거해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요청했으며 외무부장관은 주한 안보리 이사국 대사들을 초치해 협조를 당부했다.
같은날 주유엔대사는 안보리 회의에 참석해 소련의 만행을 규탄하고 정부의 입장을 표명했다.
외무부장관은 9월5일에는 주한 유럽 대사들을 초치해 정부차원의 대소련 비난 성명을 발표한 데 대해 사의를 표했다. 그러면서 안보리에서의 지지 발언, ICAO 이사회 긴급회의 소집 관련 협조를 요청했다.
이 밖에도 비밀해제된 1983년 외교문서에는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의 야권 인사 시절 동향이 담겨 있었다. 타 정부기관 외에 외교부도 두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김대중 동정'이란 문서에는 미국 체류 중 강연·오찬·연설 일정 등이 기록돼있었다.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 단식 투쟁에 대한 미국 반응'이란 문서에는 단식으로 인한 정부와 미국언론 간 마찰, 양국정부간 신경전 등이 담겨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