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오상아 기자] 지난 4일 오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진행된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328회 학술발표회'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을 개원한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와 함께 사역한 '초대 선교사' 헤론(John W. Heron, 1856~1890)의 한국 방한 과정과 의미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마련됐다.
이날 동은의학박물관 관장 박형우 박사(연세대 의과대학 교수)는 '헤론의 내한 과정에 대한 고찰 - 새로 발굴된 자료를 중심으로'를 주제로 발제하며 "1885년 4월 10일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이 개원됐고, 개원 직전에 내한한 미국 북장로회의 목회 선교사 언더우드는 제중원을 근거지로 삼아 본격적인 선교를 준비했으며 6월에는 또 다른 의료 선교사 헤론이 합류했다"고 소개했다.
이어 그는 "1886년 3월에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교육 기관인 제중원의학교가 개교했고 알렌, 언더우드 및 헤론이 의학 교육에 참여했다"며 "아직 공개적인 전도가 금지되어 있던 당시, 미국 북장로회의 한국 선교는 의료 선교를 중심으로 진행됐다"고 전했다.
박형우 관장은 선교사 헤론에 대해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본부에서 한국에 파송할 선교사로 가장 먼저 임명'한 사람으로 소개했다. 그 날은 1884년 4월 28일로 박 관장은 이 임명이 미국 북장로회 뿐 아니라 개신교 최초의 한국 선교사 임명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 서양의학 도입 및 기독교 전래에 있어 헤론이 갖는 의미가 적지 않은 실정에서 그에 대한 연구가 기존에 알려진 단편 자료들이 계속 재인용되고 있을 뿐 새로운 자료의 발굴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본 연구자는 미국 북장로회 아카이브에 소장되어 있는 다양한 1차 사료, 그리고 영국과 미국의 총인구 조사, 신문 기사, 헤론 부친과 관련된 글, 헤론이 다녔던 메리빌대학교 및 테네시의과대학과 관련된 자료 등 아직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던 여러 사료들을 이용해 헤론의 집안 배경 및 내한 과정을 밝히고자 한다"고 밝혔다.
박형우 관장에 따르면 '헤론의 선교사 임명 과정'은 1883년 2월 테네시대학교 의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한 헤론이 테네시 동부에 위치한 존스보로(Jonesboro)에서 개업을 한 것으로 시작된다.
당시 헤론이 활동했던 존스보로는 미 남장로교회에 속하는 지역이었지만 헤론이 북장로회의 해외선교사로 임명된 이유에 대해 박 관장은 "남북전쟁에서 패한 후 남장로교회는 당시 해외선교에 적극 나서지 않았고, 또한 헤론에게 영향을 끼친 리아(Sarah J. Rhea, 1835~1918) 부인이 북장로회 소속의 선교사였던 점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보았다.
리아 부인은 헤론이 존스보로에 정착한 직후 만난 미국 북장로회 소속 지도자로 헤론이 의료 선교사로 지원하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리아 부인은 1860년부터 페르시아에서 남편과 함께 전도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1865년 남편을 잃은 후 1867년 귀국해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본부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박형우 관장은 "리아 부인은 헤론에게 해외 선교 사역에서 의사에 대한 요청이 많다고 주지시켜 주었고, 헤론은 의료 선교사로 파송돼 병마로 고통 받는 이들을 도와주겠다는 결심을 했다"며 덧붙여 "리아와 함게 대한YMCA 총무 위샤드(L.D. Wishard)도 헤론이 의료 선교사로 나서는데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믿어진다"고 전했다.
이에 헤론은 존스보로에 정착한 직후인 1883년 5월 2일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본부 총무 엘린우드(Frank F. Ellinood)에게 자신을 의료 선교사로 해외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혹시 어느 곳이든 해외 선교지에서 의료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요청이 있습니까? 만일 그러한 요청이 있고 총무께서 누구를 아직 정하지 않았다면, 제게 그것에 대한 정보와 의료 선교사로서 선교본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박형우 관장은 "자원이라기보다는 현재 돌아가는 상황에 대한 질문을 하는 정도에 불과했다"며 "이에 엘린우드는 현재 의사를 보내달라는 요청이 없다는 답을 보냈다. 그리고 메리빌대학의 바틀렛 총장 및 라마 교수와 면담한 후, 6월 30일 헤론에게 해외 선교에 나서게 된 동기 및 목표, 나이, 건강에 관해 간단한 설명이 담긴 지원서를 정식으로 보내되, 의과대학 교수 한 명 이상의 추천서, 교회 목사의 편지, 그리고 건강 증명서를 첨부하라고 요청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9월 헤론은 '지금은 해외 선교사로 나갈 수 없는 상황'이라는 답신을 보냈다. 박 관장은 그의 선교사 지원이 싱겁게 철회되었고, 이는 엘린우드가 헤론을 불신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전했다.
박 관장은 "처음 편지를 보낼 때는 필요하다면 당장이라도 외국으로 나갈 수 있었는데, 막상 6월 30일자 편지를 받았을 때 아직 특수 사업을 하도록 부름을 받지 않았다고 느꼈다"는 헤론의 답신 내용을 소개하며 덧붙여 "그리고 다시 곰곰이 생각해 의료 선교사로 나가기로 결심하고 부친에게 말씀드리고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부친은 곧 여동생이 집을 떠나 해외로 갈 예정이어서 의견에 강하게 반대했고, 결국 지금은 해외 선교사로 나갈 수 없지만 상황이 좋아지면 즉시 지원서를 보낼 것을 약속했다"고 말했다.
헤론의 아버지인 에버니저가 여동생의 일로 헤론의 선교 사역을 막은 이유에 대해 박형우 관장은 "목사인 에버니저는 화목한 가정을 꾸미려 상당히 노랙혔다"며 그 대표적인 예로 헤론의 선교사 지원을 철회케 한 것을 들 수 있다고 했다.
한편 헤론의 답신이 있은 후 3개월 후인 1883년 12월 13일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수정은 한국 선교와 관련해 일본인이 나서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미국의 각 교회에 편지를 보내 '한국에 (미국) 선교사들을 직접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한 사건이 있었다고 박형우 관장은 소개했다.
그는 "이수정의 이러한 요청은 미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며 이어 "평신도로서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본부의 실행위원이던 맥윌리엄스는 한국 선교 개시를 두고 아직 시기상조라는 미국 해외선교연합위원회(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의 잡지 기사를 읽은 후, 앨린우드에게 이에 대해 문의했다"고 당시의 정황을 말했다.
박 관장은 이에 앨린우드는 즉시 한국 선교를 시작해야 한다며 단, 2명의 선교사 2년치 연봉인 5천 달러의 예산이 확보된다면 즉시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며 "이에 맥윌리엄스는 2월 8일 한국 선교 개시를 위해 자신이 관리하고 있던 마퀸드의 유산 중에서 5천 달러를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고 전했다.
1840년대 초부터 뉴욕의 유명한 보석상이었던 마퀸드는 Ball, Black, & Co.를 설립해 많은 돈을 벌어 1882년 사망하면서 100만 달러 이상의 유산을 남겼다. 부인이 먼저 죽고 자식이 없었던 그는 일부 재산을 친척들에게 배분해주고 자신이 사망한 지 3년 이내에 이자 없이 수많은 기독교 관련 및 기타 단체에 돈을 기부하도록 했고, 이중 5천 달러가 해외 선교를 위해 할당된 것이었다.
한국 선교 개시 자금이 확보되자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본부는 적임자를 물색하며 먼저는 앞서 의료선교사 파송과 관련해 편지가 오갔던 헤론에게 연락을 취했다. 이에 1884년 3월 15일 헤론은 정식으로 선교사로 자원하는 편지를 보냈다.
"...당시 저는 그 일에 몰두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일이 해결되어 의료 선교사로서 공식적으로 지원하는 바입니다. 저는 이 결심을 성급히 혹은 경솔하게 한 것이 아니라 거듭 심사숙고하고 기도한 끝에 신중하게 얻은 결론입니다."
헤론의 자원 편지를 받은 엘린우드는 아마도 한국 정부가 서양식 병원을 설립하고 싶어 할 것이라는 것, 또 선교사 파송을 위한 5천 달러도 이미 확보되어 있다는 내용 등 한국 선교과 관련된 정보들을 알렸고 1884년 4월 28일 헤론의 선교사 임명 및 임지가 해외선교본부 실행위원회에서 결정됐다. 엘린우드가 헤론에게 공식적으로 보낸 편지의 내용은 이러하다.
"오늘 아침 선교본부 회의에서 귀하는 현재로서는 일본으로 가서 한국어를 배우고, 아직 열리지 않은 문으로 들어갈 준비를 한다는 조건으로 만장일치로 한국의 의료 선교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아직은 아니지만 (귀하가) 선교지로 들어갈 때가 되면 귀하와 같이 갈 (목회) 선교사가 임명되겠지요. 나는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귀하는 일본에서 훌륭한 한국어 교습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헤론의 한국 도착은 선교사로 임명된 지 1년이 넘은 1885년 6월 20일이었다. 박형우 관장은 헤론의 '꼼꼼한 성격'과 헤론이 존스보로를 잠깐 비운 사이 도착한 선교사 임명 편지의 전달이 되지 않은 것을 이유로 들었다.
박 관장은 "헤론의 답장이 없자 엘린우드는 5월 7일 편지를 다시 보내 혹시 마음이 변했으면 다른 사람을 구해야 하니 꼭 알려달라고 요청했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 선교사로 임명된 헤론은 자신이 과연 한국인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 새로운 선교지를 개척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상당한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며 "그리하여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지만 몇 개월 동안 큰 병원에서 훈련을 쌓고 가을 쯤 떠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면서, 자신이 혼자 가는 것인지 목회 선교사가 동반하는지 궁금해 했다. 그러면서 결혼은 언제 해야 하는지, 병원은 언제 열 수 있는지 등의 많은 질문과 함께 새로운 선교지 한국에 대한 정보를 알려달라고 계속 요청했다"는 1884년 6월 9일자 편지 내용을 박 관장은 소개했다.
헤론은 동업자 깁슨의 딸 해리엇에게 청혼을 하면서 선교사로 한국에 가자고 요청해, 결혼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해리엇이 한국에서 한 선교 활동을 소개하며 박형우 관장은 "그녀는 헤론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자신도 여성들을 상대로 활발한 선교 활동을 보였으며, 헤론이 사망한 이후 게일과 재혼을 했고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1908년 소천했다"고 전했다.
덧붙여 "알렌이 미국으로 돌아간 후 헤론이 제중원의 책임을 맡으며 힘에 겨워했을 때 장인과 장모는 자신들을 한국으로 파송해 줄 것을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본부에 요청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박형우 관장은 엘린우드는 6월 15일 헤론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 파송과 관련해 논의할 사항이 있다며 7월 3일 선교본부를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해 대화를 나눴지만 어떤 내용인지는 확실치 않다고 했다. 이어 헤론에 대한 추천서가 7월 5일 메리빌대학의 크러포드 교수, 라마 교수, 7월 9일 테네시대학교 의학부의 빕 교수, 7월 11일 이브 학장으로부터 선교본부로 보내졌다며 '이미 선교사로 임명'된 이에 대한 추천서가 다시 보내진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바트렛 총장의 편지에 의하면 7월 21일 헤론은 선교본부가 자신의 파송을 이듬해 봄으로 연기한 것 같은데, 그 진위 여부를 문의했다. 그리고 어쨌건 내년 봄까지는 임지가 결정될 것으로 믿으며, 그동안 뉴욕 의학대학원에서 좀 더 연수를 쌓고 싶다고 요청했다"고 했다.
박 관장은 "이에 선교본부의 미첼(Arthur Mitchell)은 7월 23일자로 헤론에게 편지를 보내 최근 한국행을 요청했던 중국의 알렌을 한국으로 들어가도록 조치했다며 헤론의 뉴욕 의과대학원에서의 연수를 허락했다"고 말했다. 알렌은 앞서 6월 9일자로 아내의 건강 악화 등을 이유로 자신을 한국으로 파송해 줄 것을 요청했다.
"중국에 있는 의료 선교사의 한 명인 알렌이 공사관과 세관의 의사로서 한국으로 가겠다고 요청했습니다. 동료 선교사들의 조언에 따라 선교본부는 그가 즉시 한국으로 들어가도록 전보를 보냈습니다. 그는 공사관에서 일을 하지만 선교사로 가는 것이니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첫 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현재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다른 의사를 내년 봄에 한국으로 파송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알렌은 분명 병원 사업을 할 수 없을 것이고,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 여러 공사관에서 의사로 활동하고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의료 선교사로서도 일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은 선교본부가 신경을 써야 하는 유일한 선교지가 아니며, 당신이 관심을 갖는 유일한 선교지가 아닐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이즈음 '뉴저지의 언더우드' 선교사가 등장한다. 박형우 관장은 "7월 14일에는 해외 선교에 나서기로 결심을 굳힌 뉴저지의 언더우드가 목회 선교사로 지원했다. 그는 이수정의 호소를 읽고 감명을 받아 자신이 소속된 화란개혁교회에 한국으로 파송해 줄 것을 요청을 했지만 예산이 없다는 답을 듣고 고민하던 중 마침 북장로회에서 한국으로 파송될 목회 선교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고 말하며 '7월 28일 선교사로 임명됨과 동시에 한국이 임지로 결정됐다'고 설명했다.
박형우 관장은 "헤론은 9월 16일부터 뉴욕 의과대학원에서 연수를 받기 시작해 치열한 경쟁 끝에 우수한 성적을 받아 1885년 1월 말부터는 100병상 규모의 블랙웰 아일랜드 암스하우스병원에서 부의사로 경험을 쌓는다"며 "의술이 더욱 정교해졌음은 물론, 이즈음 테네시대학교 의대 교수로 초빙을 받았지만 한국에서의 선교 사역을 위해 이를 사양했다"고 말했다.
박 관장은 또 "헤론은 YMCA 모임에 적극 참여해 그곳 의과대학생들에게 의료 선교사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며 2월 2일 한국행이 결정돼 4월 23일 헤리엇과 결혼하고 5월 9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해 일본에 잠시 체류한 후 6월 20일 제물포에 도착했다고 전했다.
박형우 관장은 끝으로 이날 발표와 관련해 "다른 연구자들의 추후 연구에 의해 한국 기독교 도입사에서 헤론이 갖는 의미가 보다 분명하게 밝혀지기를 소망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