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3년 4월 7일 유대인은 국가의 모든 공직에서 배제된다는 아리아인조항(Arierparagraph)이 공포되었고 독일 교회에서도 이것을 받아들였다. 본회퍼는 이것을 비판하였다. 그는 유대인 문제에 대한 교회의 정치적 책임을 강조하며 '바뀌 아래 깔린 희생자에게 붕대를 감아주는 것뿐만 아니라 바퀴 자체를 멈추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유석성 총장의 '현대 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꼭 알아야 할 신학자 28인'의 '디트리히 본회퍼' 中)
히틀러 정권 아래 저항의 신학을 펼친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의 전공자이자 한국본회퍼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서울신학대학교 유석성 총장이 12일 케리그마신학연구원(원장 김재진 박사)의 본회퍼 세미나의 첫 강사로 나섰다.
이날 본회퍼 세미나를 위해 신촌성결교회를 찾은 청년부터 중년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참여자들에게 유석성 총장은 먼저 "인생에 대한 문제를 줄이고 줄이면 삶과 죽음의 문제이고, 죽음과 죽음 이후에 답은 종교에서밖에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평일 저녁임에도 고단한 기색도 없이 이들은 유 총장의 말을 경청했다. 유석성 총장은 "근데 왜 내가 죽음 얘기를 하냐면..."이라면서 '본회퍼' 얘기를 했다. 1945년 4월 9일, 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패배를 한달여 앞두고, 히틀러의 자살을 3주 앞두고 교수형에 처해진 '본회퍼', 그에 관한 세미나는 '죽음'에서부터 시작됐다.
유 총장은 그의 저서 '현대 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꼭 알아야 할 신학자 28인'에서 본회퍼의 생애를 정리하며 이렇게 썼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계획이 실패로 끝났다. 즉시 많은 저항자들이 적발되었고 9월 이 모반에 방위부가 연관되어 있는 문서가 발견되자 본회퍼의 암살계획음모가 확실히 밝혀져 10월 8일 프린츠- 알브레히트 가(街)에 있는 비밀경찰 지하감옥으로, 1945년 2월 7일 부헨발트 집단수용소로, 4월에 국제적 죄수그룹과 함께 본회퍼는 레겐스부르크로, 그 다음 바이에른 지방에 있는 쉰베르크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플로센뷔르크 집단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리고는 1945년 4월 9일 이른 아침 교수형에 처해졌다.... 본회퍼가 처형된 같은 날 그의 매형 도나니는 작센하우젠에서, 본회퍼의 형 클라우스는 4월 23일 베를린에서 각각 처형되었다"
그는 그 책에서 "본회퍼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교수대로 이끌리어 나갔다"며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삶의 시작입니다"는 본회퍼의 마지막 말을 소개했다.
이날 유석성 총장은 "본회퍼는 그렇게 죽었기 때문에 오늘 이렇게 살아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 총장은 그의 책에서 본회퍼의 마지막 순간을 더 자세하게 소개한다.
"본회퍼는 판결문이 낭독되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진지한 자세로 기도하고 처형대로 올라갔다. 그는 다시 짧게 기도하고 용감하게 교수대를 붙잡고 얼마 후 숨을 거두었다. 본회퍼의 최후를 목격했던 수용소 의사 피셔 휠슈트룽은 '나는 약 50년 동안 의사로 활동하면서 그렇게 신께 헌신적인 모습으로 죽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던 것 같다'고 본회퍼의 마지막 모습에 관하여 회고하기도 하였다"
유 총장은 이날 세미나에서 "본회퍼를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예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가 죽을지도 몰랐다. 가다보니 처형을 당했고 그의 삶과 신학이 어우러져서 각광을 받게 됐다"며 "본회퍼가 그렇게 처형됐기 때문에 그렇지 살았으면 이만큼 하지 않았을 것이다"고도 했다. 그러나 "살아 있었더라면 큰 신학자 됐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본회퍼 인기는 70년대초에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더불어 한국에도 상당히 부각됐고 많은 이들이 큰 용기와 위안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는 독일 얘기를 꺼냈다. 유 총장은 독일 튀빙엔 대학에서 위르겐 몰트만 박사의 지도로 본회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은 사람 이름을 교회 이름에 많이 붙이는데 저희 대학 기숙사 옆에 교회 이름을 본회퍼교회로 붙였다"며 "제가 본회퍼를 전공으로 논문을 제출하고 나서 본회퍼 세미나가 열렸는데 학생들이 너무많이 와서 강의실을 두번이나 옮겼다"고 했다.
유 총장은 "본회퍼는 독일에서는 전천후다"며 "한국에서는 공자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면 일단은 다 수긍한다. 독일에서도 그런 사람이 몇명 있는데 칸트, 본회퍼가 그에 속한다. 본회퍼가 말했다고 하면 일단은 받아들인다. 진보적인 사람은 진보적인대로, 보수적인 사람은 보수적인대로 그 안에 진보적 요소와 보수적 요소가 다 있기 때문이다"고 했다.
이어 그는 '본회퍼'의 신학과 삶에 대한 본격적인 소개에 들어갔다.
유 총장은 "'행동하는 신앙인'이 본회퍼에 대한 별칭이다며 "그는 자기가 고백한 신앙을 그대로 실천하고 그것 때문에 죽은 것이고, 죽임을 당한 것이다"며 '순교자적인 죽음'이라고 했다.
그는 "순교자라고 지금은 인정하는데 1945년 2차대전이 끝난 후에는 교회에서는 순교자라고 선뜻 인정하지 않았다"며 "직접적인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히틀러 암살 계획이라는 정치적 사건이라고 본 것이다"고 했다.
이어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면 정권을 획득하려거나 정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동기가 신앙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순교자로 인정한다"고 했다.
그는 "가톨릭에서 영국 성공회와 합동으로 20세기 순교자를 여러명을 선정해서 그들을 위해 웨스터민스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때 본회퍼를 20세기 순교자로 선정했다"고 했다. 덧붙여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Karl Paul Reinhold Niebuhr)는 일찌감치 본회퍼는 순교자였다고 얘기했다. 현대의 사도행전이라고 칭송했다"고 했다.
또 유 총장은 "그가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가장 본질적인 것, 기독교인으로서 살아가는 참된 모습, 더군다나 교회가 무엇을 해야되는지를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도 유용한 것이다"고 했다.
그는 "한 마디로 그가 얘기했던 것을 그대로 얘기하면 '타자를 위한 교회'가 돼야된다는 것이다. 그것에 앞서 예수 그리스도를 '타자를 위한 존재'라고 규정했다"며 "그 말속에 모든 신학적인 근거가 다 있다"고 했다.
이어 "그 말은 본회퍼의 '옥중서간' 저서를 위한 초안, 그 속에 나오는 말인데 한국교회가 지탄받는 이유도 타자를 위한 교회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또 "종교개혁 이후에 '제자직'을 잃어버렸는데 20세기에 들어서 본회퍼가 그걸 제시했다"며 "참된 제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요, 순종하는 길이요,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길이다고 새롭게 환기를 시켜줬다"고 했다.
유 총장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뭐가 문제냐는 본회퍼를 가지고 진단할 수 있고 처방을 내릴 수 있고, 치료할 수 있다"며 본회퍼의 신학과 삶의 근간인 '타자를 위한 존재 예수', '타자를 위한 교회', '십자가 중심의 삶', '제자의 삶'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과 삶, 그것이 본회퍼의 가장 핵심적인 것이다"며 "그리스도교에서 그리스도 빼면 아무것도 안 남는다. 본회퍼는 가장 본질적인 것을 신학적 주제로 삼고 거기서부터 자기의 고백을 하고 실천하려고 했던 사람이고, 그러다가 그렇게 죽은 사람이다"고 했다.
이어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 총장은 "신앙은 믿음에서 출발하지만 실천에서 끝나는 것이다"며 "본회퍼는 '책임적인 교회와 기독교인의 책임적인 모습'을 본회퍼가 가르쳐줬다"고 했다.
그는 "사랑, 사랑 하지만 사랑은 사회적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상상 속에서 있는 것이 아니고 실천할 때 완성된다. 그것이 본회퍼에게 배워야될 점이고 본회퍼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다"고 했다.
시대적으로는 "1945년 이후에 세계 신학계에 새로운 신학을 만들 출발점이자 착안점 이런 것들을 제공을 했다"고 평했다.
이어 "그 방향은 '타자를 위한 교회' 였고 WCC 운동의 뒷받침이 되기도 했다"며 또 "본회퍼의 신학은 상황신학이라고 하는 유럽의 정치신학, 남미의 해방신학, 민중신학 등과 연관이 돼있고 상당부분 영향을 줬다"고 유석성 총장은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