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구약학의 스승으로 불리던 구약학자 만수 김정준 박사를 조명한 연구가 발표됐다. (사)한국교회사학연구원 제194회 월례세미나에서 윤보선 연구로 각광을 받고 있는 김명구 박사(연구원 실행위원)가 "서북적 경건과 비서북적 민족의식의 합치"를 주제로 만수 김정준 연구를 발표했다.
김정준 박사는 방대한 학문활동을 한 신학자로, 그 학문적 깊이가 남달랐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한국적 신학을 모색하려 했고, 신학이 상아탑 안에 갇히는 것을 거절했다. 때문에 그의 신학에서는 학문과 신앙, 삶이 나뉘지 않았고 그래서 생애 전체를 실존적 자세로 임했다. 김명구 박사는 "가 한국 사회를 향해 하나님의 공의를 외친 것은 그러한 신학적 신념의 발현이었다"고 했다.
김정준 박사는 경건적 훈련을 위해 고전 경건서적들을 번역했고, 학생들에게는 새벽기도회를 강조했다. 김명구 박사는 "김정준에게 있어 신학의 위치는 교회를 섬기는 것이며 선교를 위한 도구였다"며 "시한부로 선고된 결핵으로부터 기적적으로 회복되는 은총을 체험했고, '다만 은총의 손길에 붙잡혀' 산 인생이라 고백하며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다하려 했다"고 평가했다.
또 김정준 박사는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의 개척자로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의 선구자였으며, 송창근의 계승자로 한신대학 전통의 한 축을 차지하기도 했다. 김명구 박사는 "학문적으로는 매우 엄격했지만 그를 존경하는 제자들이 유독 많았다"고 밝히고, "민주화회복운동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였고, 박정희 정부의 한일회담과 유신에 반대했다"며 "민족교회적 인식의 발로"라고 설명했다.
특히 김정준 박사는 한국교회의 보수그룹이 하나님의 복음을 한국 선교초기의 선교사들이 소유했던 것으로 제한할 때, 그는 그것을 사양했다고 한다. 독자적인 한국신학과 독립적인 한국교회를 모색하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김명구 박사는 "그것이 김정준의 역사적 계보, 곧 비서북의 계보가 주장했던 역사 지향적 신앙유형만을 고집한 것이나 영미 복음주의적 경건의 외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그는 한국 민족교회의 두 중심 주제, 곧 '초월적 경건'과 '역사 지향'의 신앙을 합치하려 하였던 것"이라며 "교회의 역할을 교회 내부로 제한시키지 않았고 사회적 영역으로 확대시켰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김명구 박사는 "민족교회 안에서 교회와 민족이 언제나 소통했고, 교회가 민족의 당면 과제를 외면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역사를 지향하되 역사에만 머무르지 않았고, 초월이 근거요 바탕이었지만 초월적 신앙만 주장하지 않는 것이 민족교회"라고 설명하고, "한국교회의 이러한 태도로 인해 한국민족은 한국교회가 민족을 견인할 수 있다는 신뢰를 보냈다"고 했다.
김 박사는 "기독교란 한 생명이라도 소외시키지 않으려 하고 이 세상에 온누리 공동체를 이어 나가고자 하는 것"이라 말하고, "영혼과 몸의 통전적 구원이 기독교 복음 선포의 핵심이며 동시에 한국 민족교회의 이념이었다"며 "김정준 박사의 삶은 이것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그의 생애와 사상에는 이러한 민족교회의 정신이 내포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영적인 것과 인간의 삶을 통합하는 전인적이고 포괄하려는 것이 김정준 박사의 이상이었다. 그래서 김정준 박사는 이 땅이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는,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 공의가 실현 되야 한다고 믿었다. 때문에 그는 개인구령에만 매달린 부흥회적 경건을 비판했다. 더불어 민족에 대한 책임, 민주주의 내에 내재되어 있는 저항의 의식이 어떠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으며, 당연히 사회 개혁적 성향, 사회나 정치에 대한 교회의 관심, 높은 도덕적 교양과 행위 규범, 기독교가 갖고 있는 합리성 등을 강조했다.
특히 김명구 박사는 "김정준이 교회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에는 소극적이었지만, 독재나 비민주주의 의식에 대해서는 반대를 분명히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민족의식과 한국교회 전통에 대한 자부심, 그의 신학 자체가 정치적이었기에 김정준 박사와 그가 이끄는 한신대는 정부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김정준 박사는 민족적 자부심에 한일수교회담을 반대했고, 윤보선을 중심으로 했던 반대 그룹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했다고 한다.
김명구 박사는 "인간의 삶의 자리를 외면하고 초월적 하나님만 찾겠다는 생각이 그의 신학에는 없었지만, 현세성(this-worldliness)과 초월성(transcendentalism)이 분리되지 않았다"며 "교회와 민족을 나누지 않았고, 그러한 이유에서 그의 신학은 사회변혁의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경건적이었다"고 했다.
한신대학의 일각에서 민족교회의 전통아래 있던 경건이나 민족의 개념의 개념을 탈피하려 했을 때, 일방적인 역사 참여를 주장하고 민족을 세분하여 민중지향으로 나아가려 할 때, 김정준 박사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김명구 박사는 "역사와 신앙을 나누지 않았고, 학문과 경건을 나누지 않았으며, 언제나 교회가 주체였고 사역자는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도구라는 생각을 고집했기 때문"이라 했다. 김정준 박사는 민족을 나누어 민중세력과 지배세력으로도 가르지 않았다.
김명구 박사는 김정준 박사가 "교회와 교회를 나누지 않았고, 그래서 적극적인 일치와 연합운동을 부르짖으며 에큐메니칼 운동을 선도했다"고 설명하고, "사상적인 측면에서 김정준은 '민족교회의 계승자'로 그 위치를 지정할 수 있고 계보적 측면에서도 그는 민족교회의 역사와 신학을 이어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평하며 발표를 마무리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