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서남쪽 150Km 지점에 페트라 유적이 있다. '영원한 시간의 절반만큼 오래된, 장미빛 같은 붉은 도시'라고 영국의 시인 존 버곤이 묘사하였듯이 붉은 사암으로 된 거대한 바위 틈새로 난 좁고 깊은 골짜기를 따라 한참을 가면, 갑자기 웅대한 건물의 정면이 나타난다. 궁전 아니면 신전으로 생각되는 헬레니즘 양식의 건물 정면은 커다란 암벽을 파서 만든 것으로 정면에 있는 문으로 들어서면 복도가 나타나고, 이 복도를 따라가면 암벽을 파서 만든 방들이 나타난다.

페트라 시 대부분 건물들은 이같이 암벽을 파서 만들었으며, 결코 좁지 않은 지역에 펼쳐진 이곳에는 극장과 온수 목욕탕 그리고 상수도 시설이 갖춰진 현대 도시 못지않은 도시가 유령처럼 버티고 있다. 천연 요새로 사방이 절벽으로 방어된 이 도시는 마치 지하에 구축한 지하 왕국이 연상될 만큼 신비롭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유대 민족을 이끌고 당시 초강대국이던 파라오의 땅을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긴 여행을 하던 중, 당시 에돔 왕국 수도이던 이곳에서 통행 허가를 못 받아, 멀리 우회하여 느보 산으로 갔다는 전설이 있다.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이곳에는 모세가 지나갔다고 하여, '무사와디' (모세의 계곡)라고 부르는 곳과 '모세의 샘'이라고 부르는 우물이 여러 곳에 있어 현대 순례객을 불러 모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페트라는 요르단이 세계에 자랑하는 국보 1호의 역사적 유적이며 이집트 피라미드와 더불어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다. 이곳은 기원전 1400~1200년 에돔과 모압의 접경 지역에 자리한 곳으로 구약에서 에돔의 셀라(Sela)로 언급되고 있다.

'셀라'는 히브리어로 '바위'를 뜻하며, '페트라'는 그리스어로 '바위'를 뜻한다. 이 지역은 또한 '바위에 거하는 자들'이라는 뜻을 지닌 '호리 족속' 거주지였으며, 사사기 1장 36절에서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라 언급한다. 구약의 셀라와 이곳을 같은 장소로 본 사람은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였다. 성경에는, 이 도시에 거주하던 미디안 왕 레겜(Rekem)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살해된 곳이다(민31:8;수13:21).

또 "유다 왕 아마샤가 염곡에서 에돔 사람 일만을 죽이고 또 셀라를 쳐서 취하고 이름을 욕드엘이라 하였더니 오늘날까지 그러하니라"(왕하14:7)

유다 자손이 또 일만을 사로잡아 가지고 바위 꼭대기에 올라가서 거기서 밀쳐 내려뜨려서 그 몸이 부서지게 하였다(대하25:12). 어느 바위 꼭대기인지 어느 골짜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만 명 에돔 사람이 절벽 아래로 떨어져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곳이다. 에돔 성읍인 셀라(Sela)는 욕드엘과 동일시된다. 에돔은 붉다는 뜻인데 실제로 온통 바위가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어 어쩌면 일만 명의 흘린 피를 상징하고 있는 듯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붉은 빛을 띠고 있는 페트라의 도시다.

1950년대 이 지역에서 한 발굴 작업으로 이 지역에 적어도 기원전 7000년경에 문명이 존재했음이 드러났다. 당시에 농경문화를 간직한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부터 에돔이 이 지역을 다스리던 기원전 1200년 사이 역사적인 정보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았으나, 이후 형성된 에돔 왕국은 셀라를 수도로 하였으며, 이 에돔 왕국의 실체는 성경을 통하여 추정해 볼 뿐이다.

무엇보다도 페트라는 나바티안들이 남긴 아름다운 건축물들로 말미암아 그 명성을 얻었다. 유목 생활을 하던 서부 아라비아에서 이주해 온 부족들이 이 지역에 정착한 것은 기원전 6세기경이다. 이들은 기원전 580년경 에돔 족과 혼합되었으며 기원전 6세기에서 주후 106년경까지 페트라를 중심으로 거주하면서 이곳을 나바티안 문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나바티안들은 왕의 대로를 장악하고 이 지역의 무역과 상권을 주도하였으며, 페트라를 교역의 중심지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주후 106년 로마에 점령당하기까지 문명의 절정을 이루었다.

기원 후 106년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점령당하였고, 131년에는 하드리안 황제가 페트라를 방문하고 이곳 이름을 '하드리안의 페트라'라 불렀다. 로마 시대에 아라비아 사막에 새로운 상업로가 개척되면서 페트라의 중심적 역할은 점차 쇠퇴하였으며, 후기 로마 시대에 이르러서는 도시의 상업적 역할보다는 트랜스 요르단과 남부 시리아의 종교적 중심 도시로 자리하게 된다.

주후 4세기에는 기독교가 왕성한 지역이었으나, 주후 6세기에 있었던 큰 지진으로 인해 함몰되어 폐허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아랍 이슬람이 요르단을 점령한 7세기에서 1812년까지 이곳은 잊혀진 도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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