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침몰 닷재째인 20일 새벽 팽목항. 전날 늦은 밤 구조대의 사상 첫 선내 진입이라는 기쁨은 찰나에 불과했다.

자정을 앞두고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남학생으로 추정되는 시신 3구가 선수지점에서 잇따라 인양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매표소에 차려진 상황실 인근에 모여 혹시나 있을지 모를 기적을 기대하던 실종자 가족들은 너나할 것 없이 장탄식을 내질렀다.

선착장 인근 천막에 설치된 사고 현황판에는 이날까지 확인된 36명의 사망자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름 옆에는 '목포 K병원', '서울 목동 H병원', '인천 K병원' 등 시신이 안치된 병원명이 나란히 붙어있었다. 사망자의 대부분은 학생이다. 한때 같은 공간에서 뛰어놀았던 아이들은 이제 죽어서 뿔뿔이 흩어졌다.

실종자 가족들은 5일 동안의 피로가 쌓인 눈을 손등으로 부비고 현황판 귀퉁이에 적힌 시신의 인상착의를 꼼꼼하게 살폈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본 피붙이의 옷차림과 일치하지 않았다고 해서 안도하는 가족들은 없었다. 누가보더라도 고통스런 하루가 더 연장될 뿐이었다.

이날 발견된 3구의 시신 중 2구는 맨발인 채였다. 모두 안산 단원고 학생으로 확인됐다. 실종자 가족들이 물러난 뒤 자원봉사자들은 "어린 것이 얼마나 추웠을까"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새벽 1시께 자원봉사단체에서 나눠준 노란색 점퍼를 입은 중년 남성이 선착장 옆에 깔아놓은 스티로폼에 앉아 줄담배를 피웠다. 그의 시선이 가 닿은 곳은 팽목항과 사고해역을 가로막은 무인도였다. 사고해역에서 쉼 없이 쏘아올린 조명탄이 무인도의 일그러진 실루엣을 부각시켰다.

중년 남성은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고 2시간여를 망부석처럼 그 자리를 지키며 담배를 피웠다. 혹여 있을지도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선착장 주변에 배치된 의경들은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를 지켜봤다.

오전 1시30분께에는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점퍼가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울먹이며 상황실 쪽으로 달려왔다. "옷이 떨어졌다"고 주변 사람들이 큰 소리로 일러줬지만 그녀의 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뒤이어 남편인 듯한 이가 힘없이 점퍼를 주워 여성의 뒤를 따라갔다.

오전 1시55분께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우리 아들, 우리 아들"이라고 외치며 이번에는 상황실 반대쪽으로 달려갔다. 시신을 내리는 행정선부두쪽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듯한 그녀를 염려해 119구급대원과 군인 10여명이 쫓아갔지만 붙잡을 엄두를 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50m 쯤 달리던 그녀가 앞으로 넘어졌다. 실신해 넘어진 것인지, 넘어져 실신한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근처에 있던 자원봉사자들이 쓰러진 어머니를 부축하며 너나할 것 없이 "119"를 외쳤다. 여성을 실은 구급차가 황급히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중년 여성 두명은 서로 부둥켜 안고 "우리 딸은 어떻게"라며 눈물을 쏟았다.

사고발생 당일부터 팽목항에서 천막을 치고 실종자 가족들에게 음식물을 공급해왔다는 한 기독교 봉사단체 관계자는 "(실종자 가족들이)사흘 동안은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다가 어제부터 오뎅국물 정도는 드시는 것 같은데 도무지 밥을 먹을 생각을 안 한다"며 "여기 음식물을 소비하는 것은 대부분 봉사자나 기자들이다. 실종자 가족들에게 저러다 큰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일부 실종자 가족은 삼삼오오 모여 이날까지 여전히 잘못 집계된 사고현황으로 자신들을 극도의 혼돈 속에 몰아넣은 정부를 향해 울분을 토해냈다.

팽목항 임시숙소와 진도실내체육관에서 머물던 실종자 가족 중 300여명은 사고 초기부터 계속된 정부의 미숙한 대처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에게 직접 항의하겠다며 상경길에 나섰지만 동이 틀 무렵까지 경찰병력에 막혀 진도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눈물과 울화가 교차하는 팽목항은 실종자 가족들에게는 이제 사지(死地)와 다름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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