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 : 새문안교회 이수영 목사
본문 : 갈라디아서 6:1~5(갈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갈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6: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갈6: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갈6: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오늘 본문은 한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이 서로를 대하며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 대단히 중요한 신앙적 삶의 자세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1절을 다시 봅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한 데서 "범죄한 일"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살인이나 폭행이나 도둑질이나 사기 같은 명백한 죄를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는 죄인지 아닌지 잘 모르고 지내던 일들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앞서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 같은 것들이라고 열거한 "육체의 일"같은 것입니다(갈5:19-21).
전에는 죄라기보다는 그저 성격과 생활이 좀 느슨하거나 절제되지 않은 정도의 문제로 여기고 있었다가 복음을 접하게 되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할 만큼 죄가 되는 것으로 깨닫게 된 일들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한 데서 "드러난다"는 말은 "밝혀져서 놀란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육체의 일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할 수 있는 죄적인 행위라는 사실을 깨닫고 놀란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아니라는 증거인지를 미처 모르고 있다가 알게 되고는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고민에 빠지고 낙담하며 불안해지거나 괴로움과 수치심과 죄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경우를 생각하며 사도 바울은 쓰기를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이라 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교인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있을 경우 같은 믿음의 형제자매로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가르치려고 한 것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본문을 시작하며 "형제들아" 한 말 속에 담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말한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서 고민과 낙담과 불안과 괴로움과 수치심과 죄책감에 빠진 이들이 모든 교우의 형제임을 우선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한 것은 오늘날의 말로는 "형제자매들이여"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만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을 자신의 "형제들"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서도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라는 가족공동체로서의 인식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형제들아" 하고 부른 이들을 가리키며 "신령한 너희는"이라고 합니다. "신령한" 사람이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에 대한 권면을 시작하기에 앞서 그들을 "신령한 너희"라고 부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무슨 범죄를 행한 일이 드러난 사람, 죄인 줄 모르고 행하던 여러 가지 일들이 죄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민과 낙담과 불안과 괴로움과 수치심과 죄책감에 빠진 이들을 대할 때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답게 즉 신령한 성도의 자세로 그들을 대해야 함을 가르치려고 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곧바로 죄인 취급하고 비난하며 정죄하는 재판장처럼 행세하려 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신령한 사람 즉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서 맺히는 열매의 하나가 온유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곧바로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으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로잡는다"는 말은 본래 어긋난 뼈를 제 자리에 맞춰놓는다는 의학용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난" 사람을 죽을 사람 취급하지 않고 무의식중에 발을 삐었거나 자기 실수로나 아니면 남의 불찰로 무리한 몸동작을 하게 되어 뼈가 어긋난 사람처럼 불쌍히 여기고 빨리 고쳐주어 바로 걸을 수 있게 해주어야 할 대상으로 여길 것을 은연중에 권면하고 있다고 봅니다.
"신령한" 사람, 즉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어떤 실수를 범하는 사람을 위하는 마음과 도움으로 입증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도와주어야 할 근거는 누구든지 같은 시험을 받고 같은 죄를 범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쓰기를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으라." 한 후에 곧바로 이어서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합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도 편지하며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했습니다.
두 사람이 같이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이 발을 삐어서 걸을 수가 없는데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하고 그냥 헤어진다면 그거 어디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하물며 같은 믿음의 공동체에서 그럴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우리 교인 중에 누구와 함께 식사를 하고 나서 헤어지려다가 제가 갑자기 어지러움증이 일어나서 걷기가 힘드니 잠시 앉아서 쉬다가 가야겠다고 하는데 "목사님,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하고 혼자 훌쩍 가버린다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하는 권면이 본문 2절의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하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온갖 육체의 일에 젖어 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그 모든 것을 싹 끊고 성령의 열매들을 맺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 짐이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옆에서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로 서로 짐을 져주는 것이 형제자매들이고 신령한 사람들이며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사도 바울은 가르치는 것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법"은 모세를 통해 주어졌던 율법을 대신하여 들어선 은혜의 법이며 사랑의 계명입니다. 죄인들인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이웃뿐 아니라 우리의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법이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하물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서는 두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서로 서로 짐을 나누어 지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 1절에서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으라." 한 후에 곧바로 이어서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하는가 하면, 이어지는 2절에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한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다 같은 죄인들이고, 바로 잡아주고 짐을 져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오십 보 백 보일 뿐입니다.
스스로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경고하며 그렇게 되지 않도록 사도 바울이 주는 권면을 우리는 본문 4절에서 듣습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 하리니" 하는 것입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한 데서 "살피라"는 말은 순금을 골라내듯이 참과 거짓을 골라내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바울이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고 권면한 것은 남의 잘못을 보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살피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과의 상대적 비교를 통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그릇된 신뢰를 이끌어내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면밀히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고 권면한 다음에 한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는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라." 합니다. 여기서 우리말 번역은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 말은 얼핏 들으면 교만하고 남을 무시하는 독선적인 사람의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우리 각자가 자신을 잘 살피면 자신에게 자랑할 것이 많으며 남에게 없는 자랑거리를 많이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자랑할 것"이란 잘 행한 일에 대한 만족감을 말합니다. 잘 행한 일이란 다름 아니라 자기의 일을 살핀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죄와 허물과 부족함을 하나님 앞에서 냉철히 살피는 것보다 더 잘 하는 일은 없으며, 자신 안에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자랑은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라." 한 것은 달리 말하면 최선을 다한 결과에 대한 만족감은 자기만 알고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만족감을 남의 만족감과 비교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매사에 다른 사람과 비교하려 할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하면 상대적으로 자기의 장점이나 잘 한 일이나 우월성을 스스로 평가하려 할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서 냉철하게 살피는 일이 잘 하는 일이며, 그렇게 하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 본문 5절의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한 것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심령으로 날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살피며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이들의 무거운 짐을 기쁨으로 나누어 짐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는 신령한 성도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것이 사순절 기간을 통해 우리가 다시 한 번 새롭게 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