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전덕기 목사는 1875년 12월 서울 정동에서 부친 전한규, 모친 임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9세 되던 해 부모 모두를 여의고 숯장수인 삼촌집 양자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
전덕기는 17세 되던 해 당시 정동에서 의료선교 활동을 하던 감리회 소속 미국 선교사 스크랜턴과의 만남을 통해 결정적인 삶의 전환기를 맞게 됐다.
전덕기 목사는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에 참여했고, 상동교회 목사로 활동하면서 상동청년회 및 상동청년학원을 통해 을사늑약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또 신민회 창립 핵심인사로 항일구국운동을 선도하기도 했다.
스크랜턴은 1885년 의료선교사 자격으로 내한해 시병원을 설립하고 민중 지향적 선교를 전개한 인물로서 선생은 그의 민중 지향적 목회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1903년 전덕기는 상동교회 내에 엡윗청년회를 조직해 정순만, 박용만 등과 함께 독립협회 해체 이후 흩어졌던 민족운동 세력의 재규합을 위해 힘썼다.
이후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해 을사늑약 반대, 일제의 군용지 매수반대, 일진회 등 친일어용단체 반대 투쟁 등 반일구국운동을 전개했다.
또 그는 1897년 상동교회 안에 초등과정의 공옥여학교, 1899년 공옥남학교를 설립하고, 1904년 민족지도자급 인사들과 함께 중등교육기관인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해 민족교육사업을 실시했다.
전덕기는 상동교회와 상동청년학원의 주요 인맥인 '상동파'의 중심인물로서 안창호 등과 함께 신민회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10년 일제는 국내의 반일민족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사건을 허위로 조작했다.
전덕기는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 조직이 와해되기에 이르자, 조직을 재구축 하는 일과 신흥무관학교 등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당시 전덕기는 105인 사건으로 투옥돼 심한 고문을 받았고 석방 이후 고문 후유증으로 1914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생애는 짧았지만, 기독교 정신을 온 몸으로 구현한 '민중 목회자'이면서 방대한 항일민족세력을 구축한 독립운동가의 삶을 다 했다. 정부에서는 1962년 그를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했다. 교계에서는 학술대회와 다큐멘터리 제작 등 다양한 추모사업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