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
1974년 7월 한국외항선교회의 목사, 선교사, 장로들은 인천항에 정박하던 유고슬라비아 상선 빅토리아호에 승선해 기독교에 관심 있는 선원들과 예배를 드리고 전도 팸플릿을 전했다. 130년 전 우리나라가 서구 선교사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인 인천항이 '복음의 수출항'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 때부터 40년 간 한국교회 발전과 함께 성장한 한국외항선교회는 지금까지 153만여 명의 선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4백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 3백여 개 교회를 개척하는 놀라운 열매를 거두었다. 이러한 성과 뒤에는 창립 때부터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한 최기만 목사가 있었다. 그는 40년 사역을 한 마디로 표현해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고전15:10)"라고 고백했다.
최 목사는 6.25 전쟁 때 친형과 함께 북한을 떠나 남한에 왔다. 육군수도사단 정보처 유격대 소대장이었던 형이 동해에서 전사한 후 고아가 된 그는 학도병으로 19세 때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사선을 넘나드는 가운데 당시 육군제일야전병원 간호장교 유맹단 중위의 전도(요3장16절, 10장10절)로 예수님을 영접했다.
'주님의 종'으로 삶을 드리기로 결심한 것은 그와 같은 전쟁 고아들과 과부들이 극심한 가난과 의지할 데 없이 방황하는 모습을 접하면서였다. 마치 목자 없이 광야에서 유리하고 방황하는 영혼들 같아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낀 그는 영혼을 살리는 목회자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1952년 부산 피난 시절 서울고등학교를 다니다 이듬해 대전 서울종합고등학교에 복학했고,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한남대학교의 전신인 대전대학교 기독학과를 마쳤다. 이후 대전 제일장로교회 강사로 온 한경직 목사의 조언으로 1959년 숭실대 철학과를 편입학 한 후 졸업했다.
1960년 12월 그는 서울 영락교회 창립 기념 부흥사경회에서 아프가니스탄 초대 선교사 크리스티 윌슨 박사의 설교를 듣고 성령 역사를 체험한 후 선교사의 길로 가기로 서원했다. 아내와 두 딸을 한국에 두고 1965년 홀로 중동 자비량선교사로 떠나 1967년까지 이란 테헤란대학교에서 언어공부를 하며 파키스탄, 인도, 터키,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에서 순회사역을 했다. 귀국 후 한경직 목사의 권유로 한국외항선교회 개척에 참여해 총무, 사무총장, 상임회장 등을 거치며 일평생 항만선교 및 해외선교라는 외길을 걸었다.
최기만 목사는 "사역의 길에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셨다"며 "또 저를 위해 기도해주신 한경직 목사님, 김삼환 목사님 등의 절대적인 헌신과 애국심이 지금까지 제가 열정을 가지고 선교에 순종할 수 있도록 인도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외항선교회는 한국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한 때 창립돼 한국교회와 함께 자랐다"며 "선교회 책임을 맡은 후 △교회와 더불어 하는 선교 △전인구원적 사역 △헌신된 사역자를 통한 사역 등 세 가지를 지표로 삼아 달려왔다"고 밝혔다.
특히 처음부터 한국교회에 의해 세워져, 한국교회의 지원을 받으며 자리잡은 만큼 선교의 핵심 주체인 교회와 함께하고, 교회를 세우는 사역에 집중하며, 초교파 연합운동의 본을 보여왔다.
또 한국 사회가 외항선원에 대해 무관심하던 1970년대, 외항선원들의 복지와 현실적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복음전도와 함께 전인구원을 위한 다양한 사역을 펼쳤다. 이를 위해 인천, 부산, 군산, 울산, 광양, 포항, 제주, 평택 지부를 설립했고, 해외 지부를 설립해 타문화권 선교 기지를 구축했다. 제3세계를 위한 국제선교단체 월드컨선을 한국외항선교회 부설 협력기관으로 유치, 의료, 교육, 구제 등 다양한 사역도 진행했다. 우간다 의료센터와 영성훈련센터, 남아공선교센터, 몽골 교회개척 및 대학사역 등이 그 예다.
최기만 목사는 본부 사역을 이광선 목사에게 맡기고, 앞으로 여생을 순회선교사로 선교현장을 돌아볼 계획이다. 그는 "외항선교회가 때로는 등대처럼 빛으로, 때로는 맛을 내는 소금으로 부족한 모습대로 한국교회와 세계선교에 쓰임 받도록 붙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며 "올해 창립 40주년이 되어 새로운 도약을 이루도록 한국교회가 함께 기도해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