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은 우리와 완전히 다른 도시에 살고 있네요!"

2005년 미국 뉴욕에서 4명의 여성과 3명의 남성이 여자들이 경험한 성추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됐을 때 한 남성이 이렇게 놀라움을 표했다. '길거리 성추행(street harassment)'에 대항하는 비영리 국제연대 '할라백(ihollaback.org)'의 설립자 중 한 명인 새뮤얼 카터가 바로 그다. 같은 시공간에 머물고 있어도 그 처지가 돼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들이 많다.

때마침 뉴욕에 거주하는 타오 뉴엔이라는 여성이 지하철에서 자신을 향해 자위행위를 하는 남자를 휴대폰 사진으로 찍어 사진 공유사이트 '플리커'에 올리며 화제가 됐다. 경찰이 그녀의 신고를 무시하자 선택한 방법이다. 그녀의 이야기가 뉴욕데일리뉴스 신문의 1면을 장식했고, 이에 영감을 받아 7명의 젊은이들은 인터넷에 성희롱 체험담을 공유하는 블로그 '할라백'을 만들게 됐다. 성별, 성적취향 등을 이유로 거리, 대중교통과 같은 공공장소에서 시민을 위협하고 희롱하는 언어·물리적 괴롭힘에 광범위하게 대응하는 글로벌 단체로 발전했다. 24개국 71개 도시에서 14개 언어로 운영되는 할라백이 이달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한국은 25번째 참가국, 한국어는 15번째 참여언어가 됐다.

2005년 미국 뉴욕에서 4명의 여성과 3명의 남성이 여자들이 경험한 성추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됐을 때 한 남성이 이렇게 놀라움을 표했다. '길거리 성추행(street harassment)'에 대항하는 비영리 국제연대 '할라백(ihollaback.org)'의 설립자 중 한 명인 새뮤얼 카터가 바로 그다. 같은 시공간에 머물고 있어도 그 처지가 돼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들이 많다.   ©뉴시스

14일 저녁 서울 합정동 요기가 갤러리에서 열린 론칭파티에는 23명의 설립 멤버를 포함해 40여명이 참석했다. 미국, 인도, 사모아 등지에서 온 외국인이 반 이상이고 해외동포나 입양인을 포함한 한국계가 나머지를 채웠다. 이들이 '할라백 코리아'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하나같이 충격적이면서도 한국사회에서 충분히 당할 수 있는 사례들 때문이다.

광주지역 대표인 20대 미국여성 캐리는 "총기사용이 가능한 미국에 비해 한국이 훨씬 안전하다고 들었는데, 마이너리티로서의 차별과 성희롱을 겪어야했다"며 속상해했다. 미국에서는 주류인 백인으로서 미처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다. "홍대앞을 지나가다가 한국인 남성들이 가슴을 잡고 몸을 더듬는 추행을 한 적이 있다. 한국어를 잘 못했기 때문에 제대로 항의할 수도 없었고 경찰을 찾았지만 제대로 대응해주지 않았다"고 밝혔다.

뉴질랜드 출신으로 서울대에서 유학중인 20대 남성 P는 "한국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여자만이 아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싸움을 걸어오기도 하고, 성적소수자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기도 한다"며 "뉴질랜드에서도 할라백에 대해 들어보긴 했는데 직접적인 폭력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행위들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며 직접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외국인 남자를 사귀고 있는 20대 한국인 직장여성 진은 "서울이 국제도시가 됐다지만 남자친구와 함께 거리를 걷다보면 여전히 흉을 보거나 욕설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밤거리를 다닐 때는 위협을 느낄 정도다. 미군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역사적 선입견 때문인지 나이든 분들이나 택시기사 중에서 안 좋은 말을 하는 이들이 많다"며 안전한 이동권리를 보장받고 싶어 했다.

할라백 한국대표를 맡은 미국여성 셸 B 밀(30)은 미국정부가 제공하는 풀브라이트 장학프로그램의 지원으로 2006년 처음 한국에 왔다가 '화병'을 앓게 된 사연을 털어놨다.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은 그녀는5·18 민주화운동을 배우려고 광주를 유학지로 택했다. 당시 이 지역 대학가에서는 한미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하는 시위가 많았다. 시위대는 백인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잡아끌고, 때리고, 침을 뱉는 등 폭력을 휘둘렀다.

게다가 밤거리에서는 더 큰 모욕을 감수해야했다. 회식을 마치고 나온 남성들이 '러시아 여자 아니냐, 얼마냐?'고 성매매 여성 취급을 하고, 신체 특정부위에 대해 놀리며 백인여성을 성적으로 폄훼하는 단어들까지 2년 동안 줄곧 들으면서 몸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한국어를 하지 못하니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자 신체화 증상이 더욱 심해졌고, 결국 미국으로 돌아가 직장생활을 했어요. 그러다가 2010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보다 단단하게 무장하기로 했죠. 일단 한국어교육원에 등록해 한국어를 배우고 여러 여성관련 비정부단체의 도움을 받으며 이러한 문제에 당당하게 대응하기로 결심했어요."

밀은 서울에 살고 있으며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근현대사를 공부하고 있다. 지난 8월 뜻을 같은 하는 사람들이 모여 할라백 코리아 설립을 준비했다. 한국에서 만난 미국인 남편은 그녀의 든든한 지원자가 돼줬다. 다만 타국에서도 있었던 테러위협에 대비, 실명과 얼굴은 공공연히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

밀은 이날 할라백의 의의와 '길거리 괴롭힘'의 정의, 대처방식에 대해 상세하게 소개했다. "보통 신체적으로나 언어적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못 본 채 지나가거나 침묵하게 마련인데, 자신이 경험한 일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알림으로써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라는 점을 공유하는 것이 이러한 행위를 종식시킬 수 있는 힘이 된다"는 주장이다. 또 이러한 피해는 어린 시절에 시작되기도 한다며 "어린 학생들과 청소년들에게도 '내가 길거리를 걸을 때 누구로부터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홈페이지(korea.ihollaback.org)와 앱을 통해 영어와 한국어로 경험담과 목격담을 올릴 수 있다. 사이트의 한국지도 중 분홍색 점은 괴롭힘이 발생한 지역, 초록색 점은 괴롭힘의 목격자가 사건 해결을 위해 개입했다는 의미다. 경찰에 신고했을 때 증거가 없어 애를 먹는 경우가 많으므로 목격자는 중요한 존재다.

밀은 피해자들의 행동요령으로 ▲먼저 누가 성추행을 했는지 파악하고 ▲"그만", "하지마"와 같은 소리를 외치거나 ▲길을 물어보는 것과 같은 질문을 해서 주의를 분산시키는 시도를 할 것 ▲가해자가 아는 사람인 경우에도 돌려서라도 얘기를 해야한다고 설명했다. 목격자들의 적극적인 개입을 촉구하며 ▲동행인인 것처럼 도와주거나 ▲대중교통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등의 행위로 상황을 종결시키거나 ▲증거를 위해 사진찍기 등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밀은 "외국인들은 한국어를 잘 못하거나 외국인들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줄까봐 능동적으로 대처하거나 참견하기 힘들다. 그냥 문화적 차이라고 여기며 넘기려고 하는데 한국이 다문화사회가 돼갈수록 성희롱이나 인종차별, 외국인 혐오로 인한 길거리 괴롭힘이 늘어날 수 있다. 최근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할라백 네트워크를 시작할 때라고 봤다"고 전했다.

한편, 이날 파티에서는 몇몇 음악 공연과 함께 한 짧은 금발 여성이 검정 수영복 차림으로 "내 몸은 내 자신의 표현이며 나의 것이다. 내 몸을 허락 없이 만지거나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등의 행위에 대해서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고 선언, 큰 박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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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성추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