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안식년(1899~1900)

당시 그녀에게 붙여졌던 울트라 선교사라는 별명처럼 쉴 틈이 없이 사역에만 매달리던 데이비스는 눈에 띌 정도로 몸이 쇠약해지고 있었다. 1899년에 접어들자 그녀는 휴식을 취하지 않고는 안될 상황까지 이르렀다. 마침 그해 9월 제물포에서 열린 제8회 선교부 연례회의에서 주변의 동료들은 데이비스에게 안식년 휴가를 권고했다.

안식년 제도는 6년을 일하고 1년을 쉬는 제도로 일반적으로 안식년에 해당하는 본인이 먼저 신청하는 데 반해, 데이비스는 7년 차가 되던 해에 동료 선교사들이 나서서 권고했다는 사실은 그녀가 얼마나 자신의 사역에 몰두하고 있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데이비스의 안식년이 결정되자 하위렴은 내한한 지 3년밖에 되지 않았으나 자신은 배우자로서 그녀와 함께 안식년을 갖는 뜻밖의 행운을 누렸다.

데이비스가 조선에서 하위렴을 만나 결혼하고 첫 안식년을 맞아 남편과 함께 미국에 돌아간다는 일정이 잡히자 설렘보다는 오히려 설움이 몰려왔다. 내한한 지 9일 만에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하고도 장례식조차 참석할 수 없었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만으로도 그녀는 눈시울이 젖고 있었다. 그나마 안식년을 맞아 남편과 함께 고향에 돌아가 어머니의 묘소만이라도 돌아볼 수 있다는 생각에 잠기며 그녀는 설움을 달래야 했다.

데이비스와 함께 버지니아의 방문을 마치고, 하위렴의 고향 켄터키로 내려와 보니 옛집에는 70이 다된 늙으신 아버지만 시골의 쇠락한 농장을 지키고 계셨다. 그렇다고 두 사람은 무작정 집에만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었다. 켄터키와 노스캐롤라이나 그리고 테네시주의 여러 교회를 순회하며 조선 선교상황을 보고하고, 기도와 지원의 중요성을 환기시켰다. 일 년간의 안식년을 보내며 활력을 회복한 하위렴 부부는 1900년 10월 8일 캐나다 밴쿠버를 떠나 11월 5일 제물포를 통해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데이비스와 함께 복음사역에 전념하다

안식년으로 선교사들이 한꺼번에 자리를 비운 사이 전주지부에는 의사인 잉골드만 남아 스테이션을 지키고 있었다.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하위렴 부부는 그동안 중단되어 있던 레이놀즈와 테이트의 사역을 이어 활동을 개시했다.

선교사들이 자리를 비운 5개월여 동안에도 50여 명 정도의 교인들은 한 사람도 흔들림 없이 자체적으로 예배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위렴과 데이비스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모두가 환영하며 반겼다.

이때부터 하위렴은 팔을 걷어붙이고 교인들의 가족이 함께 교회에 나올 수 있도록 가장家長들을 권면하는 일에 공을 들였다. 그뿐 아니라 성문 근처에서 정기적으로 장이 서는 것을 유심히 살피던 그는 5일마다 열리는 장터에 관심을 가지고 장터를 돌며 전도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전주 4 대문 밖에 서는 장 가운데 남문 장과 서문 장은 대시大市라 불렀고, 북문 장과 동문 장은 간시間市라 했다. 특히 전주 남문 장은 그 당시에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장시場市였는데, 지금과는 달리 싸전 다리 동편에 있는 천변에서 열렸으며 서문 장은 완산 다리 북쪽 너머까지가 장터였다.

4 대문 주변의 장들은 날짜를 달리하며 남문 장은 2일, 북문 장은 4일, 서문 장은 7일, 동문 장은 9일에 섰다고 하니까 성곽 주변의 장들은 거의 하루건너 장이 서고 있었고, 거기에다 전주 외곽의 소양장, 봉동장, 삼례장 등 7개 정도의 장터까지 포함하면 전주 주변에는 거의 매일같이 장이 열리는 셈이었다.

지역마다 전통 장이 정기적으로 선다는 것을 알게 된 하위렴은 사람이 모이는 장터를 순회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선교는 없다고 판단하고 장이 서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다니며 열정적으로 전도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하위렴은 동료 선교사들로부터 '장터 선교의 개척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전주장터
하위렴 선교사가 전도하던 전주장터(남문밖 시장으로 추정) 멀리 기린봉이 보인다
이 당시 전주교회를 방문해 선교상황을 살펴보았던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는 '그리스도 신문'에 전주교회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전주교회가 아직 흥성치는 못했으나 차차 날로 흥왕할 모양은 이 아래 몇 가지로 알 것이다. 제일 깨달을 것은 예수의 도를 사나이만 할 것이 아니고 남녀가 다 믿어야 할 줄 알고, 주일에 예배당에 다니는 사람마다 집안 식구가 다 함께 다니기가 어려움으로, 차례로 다니는 것과 아이들도 데리고 다님이요, 그중에 한 형제의 말이 비록 큰 새악시를 데리고 다니지 아니하나 하나님의 은혜로 데리고 다닌다 하며, 또한 이곳에 남녀학당도 실시하였으며 교중 연보도 차차 성심으로 드리며 전도도 바지런히 하는 이도 있고, 장마다 위인 강화 중에 책도 팔며 전도하는 이도 있어 여러 촌에 사는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어 믿음으로 전주교회 몇 고을에 주일이면 예배하는 곳이 있더라"

하위렴은 예배 후 학습과 세례 문답을 위한 교리공부반을 열어 단계별로 가르쳤으며, 데이비스는 부인과 어린이들을 상대로 성경 말씀과 찬송가를 가르쳤다. 데이비스가 가르친 찬송 '예수 사랑하심은' 이 당시 주일학교의 주제가가 될 정도로 널리 불렸으며 초기 교회 당시 가장 많이 애창된 찬송이었다.

찬송가
찬셩시(8장) 1898, 찬숑가(190장) 1908
주일학교가 크게 부흥하면서 이듬해인 1901년에는 교인 수도 배가되기 시작하더니 1903년에는 200여 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문밖교회 뿐 아니라 이미 테이트에 의해 세워진 전주 주변 지역교회를 순회하며 성례를 베풀었을 뿐 아니라 새로 생긴 태인의 계양과 금구의 구봉리 공동체도 돌아보았다. 1901년 8월에는 정읍의 매계교회에서 일주일간 머물면서 5명에게 세례를, 19명에게 학습를 베풀기도 했다. 하위렴은 정읍지방 최초의 교회인 매계교회의 성장을 이렇게 보고했다.

"예배 출석자가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집 한 채를 사서 회집 장소로 개조했고 그들은 20리 떨어진 곳에 가 예배를 드린다."

테이트가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까지 하위렴은 전주 북부지역(고산, 여산, 함열, 임피)과 동부지역(진안, 용담, 무주, 금산, 진산)을 혼자서 맡고 있다가 1903년 마로덕Luther O. McCutchen 선교사가 새롭게 부임하자 전주 동부지역을 그에게 인계하고 하위렴은 북부지역에만 몰두했다.

백종근 목사는

백종근 목사
백종근 목사
한국에서 한양대 공과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산업연구원(KIET)에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 미국에 유학 후 신학으로 바꿔 오스틴 장로교 신학교(Austin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에서 M.Div 과정을 마치고 미국장로교(PCUSA)에서 목사가 되었다. 오레곤(Portland, Oregon)에서 줄곧 목회 후 은퇴해 지금은 피닉스 아리조나(Phoenix, Arizona)에 머물고 있다.

지난 펜데믹 기간 남장로교 초기 선교역사에 매몰해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와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두 권의 저서를 냈으며 그 가운데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 일대기를 기록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는 출간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스탠포드와 프린스턴에 이어 시카고 대학 도서관 Koean Collection에 선정되어 소장되기도 했다. 백종근 목사는 하위렴선교사기념사업회를 설립해 미국과 한국에서 설교하고, 세미나를 인도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자료를 정리해 집필 중에 있으며 한편 디아스포라 선교역사 연구회를 결성해 미주 한인교회 역사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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