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말씀인 성경을 주셨다. 성경을 주신 목적은 예수님을 믿는다면 성경대로 생활하라고 주신 것이다. 우리가 성경 공부하고 설교를 듣는 목적도 생활하기 위함이다. 성경을 읽어야 한다.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성경을 공부해야 한다. 성경을 암송해야 한다. 그러나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거기서 그쳐서는 안된다. 공부하고 연구하고 암송하는 목적이 실력을 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씨 뿌리는 비유 속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씨 뿌리는 비유에는 씨가 등장하고 밭이 등장한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렸다. 씨가 길가에, 흙이 얕은 돌밭에, 가시떨기 속에, 마지막에는 좋은 밭에 떨어졌다. 길 가, 돌밭,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는 열매를 맺지 못했다. 좋은 밭에 떨어진 씨만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해석해 주시면서 씨를 뿌리는 것은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다.
말씀이 씨가 되어 자라면 결실한다. 열매를 맺는다. 이 비유에서 네 종류의 밭에 뿌려진 씨는 같았다. 같은 말씀이 뿌려졌다. 같은 씨가 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밭에서는 열매가 맺혔고, 어떤 밭에서는 열매가 맺히지 않았다. 결실 여부는 씨 차이가 아니라 밭의 차이였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막4:21) 이 질문에 대한 제자들의 대답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너무 당연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목적은 등경 위에 두어 어둠을 밝히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고 반문하시면서 계속 말씀하셨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막4:22) 씨 뿌리는 비유를 설명하다가 갑자기 등불을 언급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씨를 뿌리는것이 씨를 땅에 숨기기 위함이냐. 씨를 땅에 보관하기 위함이냐. 씨를 뿌리는 목적은 열매를 맺기 위함이다. 등불을 가져오는 목적이 그것을 등경 위에 올려 빛을 비추기 위함인 것처럼 씨를 뿌리는 목적은 열매를 맺게 하는 데에 있다. 씨를 뿌린 목적은 씨를 땅 속에 감추기 위함이 아니다. 드러내려 함이고, 나타내려 함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하셨다. 가르침의 목적은 지키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귀를 통해 머리로 들어간다. 귀로 들어간 말씀의 최종 목적지는 우리의 머리가 아니다. 우리의 손과 발이다. 머리로 들어간 하나님의 말씀이 손과 발로 가는 데 시차가 있다. 그 시차는 사람마다 다르다. 시차가 다른 이유가 있다. 머리에서 마음으로 들어와 마음에서 말씀이 소화되어 에너지가 되어야 하는 데 에너지화되는 시간이 다르다. 이 때문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머리에서 손과 발로 가는 데 10년이 걸리고 20년이 걸린다.
안타깝게도 어떤 사람의 경우는 평생이 걸리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불과 하루, 혹은 불과 몇 분이 걸리는 사람도 있다. 머리에서 손과 발까지 말씀이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짧은 사람을 우리는 "믿음이 좋다, 신앙이 좋다, 믿음이 견고하다, 믿음 위에 굳게 서있다, 신앙생활 잘 한다"고 칭찬한다. 간혹 머릿 속에 담긴, 머릿 속에 머물고 있는 말씀의 양을 기준으로 그 양이 많은 사람을 믿음이 좋은 것으로 오해를 하는 경우도 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생활이요 행동이다. 신앙생활이 도를 닦는 것이 아닌 이유는 진리를 깨닫기 위해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밀이다. 예수님은 진리다. 공개된 비밀이다. 이 비밀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다 공개되어 있다. 그저 성경을 펼치기만 해도 진리가 보인다. 홍해 앞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고 명하셨다. 이 말씀이 모세의 귀를 통해 머리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 말씀이 모세의 머리에 있는 동안에 홍해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말씀이 그의 손끝으로 갔을 때 홍해가 갈라졌다. 나병을 앓고 있던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에게서 요단강에 들어가서 일곱 번 씻으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 말이 나아만 장군의 머리에 있을 때 그의 몸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그의 손끝으로 발끝으로 내려 갔을 때 그는 나병을 치료받는 기적을 체험했다. 성경에 기록된 역사들 대부분이 이렇다. 하나님의 말씀이 머리에서 손끝으로 발끝으로 갔을 때 역사는 나타났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교훈을 받은 대로 행하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 머리에 있는 말씀을 손과 발로 보내라는 것이다. 말씀이 우리 머리에 저장되어 있다고 해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머리에 머물 때는 진정한 말씀의 맛을 모른다. 능력도 체험하지 못한다. 머리에 있는 말씀이 손과 발로 갈 때 비로소 우리는 천국을 이 땅에서 미리 경험하게 된다.
이것을 맛보게 되면 신이 나서 머리에서 손과 발로 말씀을 부지런히 보내게 된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 이 말씀을 손과 발로 보내 보면 느낌이 온다. "아, 말씀의 맛이 이런 것이구나." 성경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머리에 부지런히 담아야 한다. 그리고 머리에 있는 말씀을 부지런히 손과 발로 보내야 한다. 소망하기는 동시에 이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머리로 들어오는 동시에 그 말씀이 우리의 손과 발로 갔으면 좋겠다. 머리에서 손과 발끝으로 가는 고속도로 내지 전용도로를 낼 필요가 있다. 아예 파이프 공사를 하는 것도 좋겠다. 그러면 우리 눈 앞에서 홍해가 갈라지고 요단강이 갈라지는것을 날마다 보게 될 것이다. 흥분할 수 밖에 없는 신나는 인생이 있다. 심장을 뛰게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겁없이 뛰는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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