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서 그와 싸워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죽이니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끊으매 아도니 베섹이 가로되 옛적에 칠십 왕이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찍히고 내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나의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삿1:5-7)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지파별로 땅을 분배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에도 가나안 경내에 이방족속들이 남아 있었기에 각 지파별로 책임지고 정복 진멸해야 했습니다. 가장 먼저 유다가 그 일을 준행하면서 베섹의 왕 아도니 베섹의 수족(手足)의 엄지가락을 자르는 형벌을 가했습니다. 힘의 상징인 엄지가락을 끊는 것은 상대에게 패배의 수치와 굴욕을 더 가중시키는 형벌입니다. 나아가 손 엄지를 자르는 것은 앞으로 더 이상 무기를 들지 못하게 하며, 발 엄지는 달릴 수 없어 도망갈 수 없게 하려는 실제적 목적도 있습니다.
그런 모욕을 당한 아도니 베섹의 고백이 흥미롭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이전에 그가 칠십 왕에게 행했던 잘못에 대한 벌로 똑같은 고통과 수치를 겪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거나 이 일을 계기로 새로 갖게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만약에 그가 그런 신앙이 있었던 자라면 처음부터 그렇게 잔인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칠십 왕들이 자기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는 모습을 보고 희희낙락했습니다. 그는 대적에 대한 엄벌을 넘어서 자기 희롱거리로 삼았던 자였습니다. 패배로 인한 한 번의 수치로 끝나게 하지 않고 평생을 두고 모욕을 준 것입니다.
그랬던 자가 곧바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성경기록에 그에게 성령의 그런 역사가 임했다고 해석될만한 힌트도 없습니다. 대적으로부터 수치와 고통을 당하면 우선 상대에 대한 복수심부터 생기고, 기껏해야 자기 잘못에 대한 후회와 반성만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아도니 베섹도 과거에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한 후회를 한 것입니다. 또 자기가 동일한 일을 겪고 보니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인생살이에서의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일반적 원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인과응보는 기독교 신앙과 무관하게 일반인들도 다 인정하고 통용되는 삶의 경구 내지 지혜일뿐입니다. 물론 성경도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잠1:31)고 잘못에 대한 인과응보적인 부정적 결과 내지 심판을 인정합니다. 그와 동시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126:5)고 선하고 성실한 노력과 수고에 대한 정당한 보상도 약속합니다.
하나님만이 세상만물을 통치하시고 인생만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그래서 특정한 사안에 대해 특정인에게 상과 벌을 개별적으로 적합하게 능동적으로 내리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선은 선대로, 악은 악대로 그 자체가 힘을 발휘하여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기 마련입니다. 말하자면 인생살이에 인과응보적인 현상이 통상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분명히 그분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정확하게 아셔야 할 것은 그분은 당신의 그런 법칙까지 넘어서는 분입니다. 어떤 원리를 제정 부여하신 분이 그 원리에 제한될 수는 당연히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 가지 규칙에 묶이실 분이 아닙니다. 당신이 만드신 선한 원리와 상충되지 않고 그보다 초월해서 더 의롭고 완벽하게 얼마든지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인생사는 결코 어떤 특정 매뉴얼에 따라 기계적으로 상벌 내지 결과가 정해지지 않습니다.
거기다 하나님의 상과 벌이 개별적 죄의 질과 양과는 비례가 되지 않게 임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벌의 경우는 그 동안에 회개치 않았던 다른 죄까지 다 망라된 것이므로 하나님의 계산에 절대로 착오가 없습니다. 인간이 느끼기에 뭔가 불공평해 보이고 이해가 안 될 뿐입니다. 반면에 신자가 당신의 아주 적은 일에 순종했음에도 그분의 상급은 엄청날 때도 많습니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 그분의 역사에는 단 한 치의 오류, 모순, 상충, 부족, 불완전함 등이 개입되지 않습니다.
만약 인생사에 인과응보만 적용되면 신자가 구태여 기도할 필요도, 나아가 회개할 이유도 없어집니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그에 따라 냉혹하게 계산된 성적표에 따라 상과 벌이 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벌 아니면 상 둘 중에 하나를 받을 것입니다. 인간의 선택은 미리부터 하나님과의 그런 이해타산을 철저하게 따져서 행동하거나, 바리새인들처럼 수백 가지 신앙의 매뉴얼을 만들어 문자적으로 준행하는 것, 둘 중 하나뿐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인과응보가 기독교적 원리가 되어버리면 그분의 긍휼에 바탕을 둔 사랑의 용서가 작동될 여지는 아예 없어집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견책치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시103:8-11)
한마디로 인과응보만 있다면 단연코 예수님의 십자가는 없었을 것입니다. 인류에게 구원의 소망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멸망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구원은 인과응보와는 정반대되는 구원입니다. 우리 죄를 그 죄에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는, 인과응보를 철저히 무시하는 구원입니다. 또 바로 그래서 복음-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기독교 외의 다른 모든 종교는 인과응보적인 구원관을 주장합니다. 착한 자가 천국가고, 악한 자가 지옥가야 한다고 합니다. 언뜻 누구에게나 쉽고도 합리적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의에 합당할 수 없음을 모르거나 짐짓 부인합니다. 거기다 나만은 평균 이상으로 의롭다고 자부하는 크나큰 교만이 깔려 있습니다.
이제 인과응보와 기독교가 무관함을 정확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잊거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과응보의 법칙 또한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부여해 놓은 원리 중의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예수 십자가을 아직 모르는 자들에게만 통용되는 일반은총인 셈입니다.
불신자들로 칼로 흥한 자는 반드시 칼로 망한다는 원리를 깨닫게 함으로써 세상을 거룩하게 통치하는 주관자가 따로 있음을 인정케 만들려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십자가 복음으로 인도하려는 그분의 긍휼의 예비하심입니다. 율법(인과응보) 대신에 은혜(긍휼의 용서)로 죄인을 다루시려는 뜻인데 십자가 은혜를 모르는 자들에겐 여전히 유효하게 역사합니다.
문제는 신자입니다. 이젠 인과응보의 일반은총을 넘어서 골고다 십자가의 특수은총 가운데로 들어와 사는 자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전의 인과응보적인 틀에 묶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벌 받지 않나 두려움에 떨며 율법적 기계적 형식적 종교생활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래서 회개, 기도, 봉사, 헌금, 예배, 찬양 같은 신앙 활동들조차 혹시라도 받을지 모르는 그분의 벌에 대한 예방책으로 행하는 신자도 꽤 됩니다. 그 반대로 더 많은 상을 받으려 열심과 정성을 다하는 신자도 아주 많습니다. 하나님을 다시 기계적 법칙으로 환원시키는 잘못이자 엄격히 말해 십자가 그리스도 은혜를 부인하는 죄입니다.
신자는 하나님 그분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자입니다. 그분이 주시는 상벌이 신앙의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 십자가 은혜 안에 있는 것만으로 그분께 받을 것 다 받았습니다. 신분, 소속, 권리, 기업 모두가 하나님의 소유이자 자녀로 이미 바뀌었습니다. 하늘의 영원한 생명책에 자기 이름이 올라가 있습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일반적 원리이자 결과적 현상일 뿐인 인과응보를 신자가 자칫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과 관계가 이해타산 방식으로 쉽게 변질됩니다. 부모 자식 간에는 인과응보 즉, 이해타산이 결코 적용되지 않습니다. 자식이 아무리 잘못해도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으로 품어주는 것이 부모이지 않습니까? 인간부모가 이럴진대 하물며 하나님은 더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恩賜)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
2015/10/15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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