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해방 이후 한국사회/기독교와 한경직/조용기 목사
해방 이후 한국교회에는 두분의 위대한 지도자가 있다. 한분은 한경직목사이고, 다른 한분은 조용기목사이다. 한경직목사는 한국교회의 주류인 장로교 출신으로, 역시 한국기독교가 가장 강한 평안도 출신이다. 한경직목사는 주류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장로교목사로서 한국교회의 중심에 있었다. 여기에 비해서 조용기목사는 한국사회에서 불교가 강한 경상도 출심으로 해방후에 비로서 한국사회에 등장한 오순절운동에 속한 사람이다. 한경직목사는 처음부터 한국기독교의 중심인물이었지만 조용기목사가 한국교회의 중심으로 등장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이 두 분이 해방 후 한국사회에서 주로 활동하는 시기는 다르다. 한경직목사는 미국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목사로서 해방 이전부터 성공한 목회자였다. 해방 후 그는 공산주의와 맞서서 싸우며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인 빌리 그래함이나 밥피얼스와 같은 부흥사들과 함께 60년대와 70년대 한국교회를 대표하였다. 여기에 비해서 조용기목사는 산업화와 더불어 그의 목회를 시작한다. 한경직목사가 피란민을 중심으로 목회를 했다면 조용기목사는 산업사회의 새로운 시민들과 함께 목회를 하였다. 조용기목사의 주 대상은 산업화의 여파로 서울로 몰려온 시골사람들이다. 한경직목사가 이북에서 내려온 피란민 목회를 했다면 조용기목사는 남한의 시골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였다.
해방 후 한국사회를 향하여 이 두 분이 사역하는 스타일이 매우 달랐다. 이북에서 월남한 한경직목사는 남한사회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세워지는 것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미군정시절부터 미군과 한국교회 사이에서 가교역할을 하였다. 그는 6.25 전쟁 직후 킨슬러 선교사와 함께 성경학교운동, 보켈선교사와 함께 군복음화, 밥 피얼스와 함께 사회봉사를 했다. 이 모든 것이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조용기목사는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이름없는 오순절계통의 전도자로서 성령운동을 통하여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선교사들과 함께 성령운동을 이끌어 갔으며, 그는 이런 부흥운동을 통한 대중적인 지지로 세계최대의 교회를 만들었다. 조용기목사는 좀더 대중적인 정서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하지만 한경직목사와 조용기목사는 다같이 영어를 매개로 해서 세계적인 기독교의 흐름과 함께 하였다. 한경직목사는 유창한 영어로 북장로교선교사만이 아니라 미국의 복음주의 부흥사들과 연합하여 70년대 대형집회의 출발점이 된 빌리그래함 전도집회를 이끌었다. 당시 한경직목사는 진보적인 NCC와 보수적인 ICCC의 중간에서 양측을 결합하는 복음주의 기독교를 이끌었다. 여기에 비해서 조용기목사는 당시 미국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오순절계통의 부흥사들과 함께 오순절적인 부흥운동을 이끌었다. 조용기목사는 주로 한국교회의 부흥사들과 교류를 가졌다. 조용기목사는 한국교회에 복음주의와는 약간 결을 달리하는 성령운동을 이끌었다.
또한 두 분은 다같이 폐결핵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갖고 있다. 한경직은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도중 결핵에 결렸고, 치료하는 도중 자신의 사명을 다시금 확인하였다. 뿐만아니라 38선을 넘어 월남하면서 자유의 가치를 확인하였다. 조용기목사 역시 고등학교 시절 폐결핵을 경험하였고, 당시 믿음으로 치유되는 경험을 하였다. 이 두 분의 삶의 밑바닥에는 다같이 폐결핵이라는 절망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이것을 극복하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었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본 강연은 이렇게 해방 후 한국교회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한 조용기목사의 생애와 사역을 역사적으로 평가해 보려고 한다, 우선 본 강연에서 필자는 조용기목사가 해방 후 한국사회의 변화에 어떻게 적응했는가를 살펴보고, 그가 한국사회와 교회에 미친 기여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I. 조용기목사와 해방 후 한국사회/한국교회
1. 조용기목사의 줌심 메시지: “지금, 여기에서”
조용기목사는 역사의 변화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구원의 복음은 불변하지만 시대에 따라서 메시지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에 사역을 시작한 조용기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는 설교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일제 강점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교회는 내세를 지향하는 믿음을 가졌다. 그래서 다시 오시는 예수가 기독교신앙의 중심이었다. 현실세계에 대한 소망을 접고 그리스도가 가져올 천년왕국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조용기목사는 해방 이후에는 내세중심의 신앙에서 현세중심의 신앙으로 바꾸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가 내세의 소망을 버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현세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용기목사가 한국사회와 교회에 미친 가장 중요한 영향은 기독교를 내세 중심의 기독교에서 현세중심의 기독교로 전환시켰다는데 있다.
조용기목사의 이같은 전환은 중세의 천주교신앙에서 종교개혁의 신앙으로 전환한 것과 비교할 수 있다. 과거 중세의 천주교는 신자의 모든 초점이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에 있었다. 따라서 신앙이 좋을수록 이 세상에서 떠나서 수도원에 들어가서 천당가는 준비를 해야 했다. 하지만 종교개혁은 이런 천주교의 신앙에서 벗어나서 현세를 신앙의 중심으로 바꾸어 놓았다. 루터는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구원은 확보한 것이고, 이제 매일 매일 주어진 삶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보았다. 칼빈은 우리가 구원을 받았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우리의 삶 속에서 열매로 입증해야 하기 때문에 현실이 중요했다. 이것은 바로 “세계내적 경건”이라는 새로운 신앙을 만들어 냈다. 이런 개신교적인 신념은 신자들로 하여금 현실 삶에 적극적이게 만들었고, 근대 서구문명을 이룩하는데 기여했다.
조용기목사는 항상 변화하는 시대에 맞추어서 자신의 메시지가 변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근본적으로 소위 상황화신학을 신봉하고 있다. 상황화신학은 무조건 텍스트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컨텍스트를 통하여 텍스트를 다시 읽는 것이다. 조용기목사가 불광동 천막에서 목회를 할 때, 예수믿고 지옥가지 말고 천당 가라고 전도했을 때 사람들은 여기가 지옥인데, 다시 지옥갈 필요가 있는가 라고 대답하였다. 여기에서 조용기목사는 바로 내세의 천당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는 설교를 하게 되었다.
이런 조용기목사의 현세중심의 설교는 성경적인 전통과 한국적인 전통에 합당한 것이다. 몰트만이 지적하는 것처럼, 원래 기독교는 죽어서 천당에 가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천국이 이 땅에 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주장했다. 동양인은 좀 더 현실적이다. 동양의 종교는 모두 현실에 근거하고 있다. 유교는 내세에 대해서 잘 가르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속도 근본적으로 현세 중심인 것이다. 조용기의 현세중심의 신앙은 성경적이면서 동시에 한국적이었다. 한국인들은 내세에 대한 관심보다 지금, 여기에 대한 관심이많았고, 조용기목사의 설교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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