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박창환의 공헌

소기천 교수
소기천 교수
박창환은 필자에게 1977년 영락교회 교사 양성부 제18기에서 “신약개론”이란 과목을 통해서 가르침을 주신 첫 만남 후에, 헬라어 문법과 강독 그리고 신약석의방법론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도 그 막대한 영향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필자가 1985년에 결혼할 때 그가 써준 휘호를 거실 한복판에 걸어두고 있으며, 2015년에 필자의 결혼 30주년을 맞이하여 다시 요한1서 5:1을 써주기도 할 정도로 자상하고 친밀하시다.

박창환은 통합과 합동의 신학교가 갈등을 하는 당시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재인 모래내의 땅을 팔아서 합동의 직원에게서 평양신학교에서부터 전해진 학적부 원본을 사오는 헌신적인 심부름도 하게 된다.

박창환은 기억력이 좋다. 예를 들면, 모든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암기하여 풀어내고, 신구약의 모든 구절과 연대를 막힘없이 줄 줄 연결한다. 또한 박창환은 학문적인 유머감각이 있다. 예를 들면, 채필근은 책을 읽을 때 대각선으로 여덟 줄을 읽는다고 하면서, 양주동을 칭찬하면서 한 장을 통째로 읽는다고 한다. 더구나 박창환은 당시 초기 한국교회가 보수적인 신학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열린 창문을 통하여 장신대의 신약학을 학문적인 토대위에 놓은 분이다. 그는 은퇴 후에도 신구약 성경 전체를 주석하고, 또한 연구소를 만들어서 모든 성경 구절을 학문적으로 연구한 내용도 방대하게 후세를 위하여 남겨놓았다.

(5) 그리운 그 이름, 박창환 학장님께 바치는 추모사

북한의 박해를 피해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혈혈단신 청년의 몸으로 사선을 넘어 오직 성경(Sola Scripture)책 하나만을 손에 들고 자유 대한을 찾은 박 학장님! 고향인 북녘 땅을 떠날 때 얼마나 소중한 물건이 많으셨습니까? 22세부터 92세까지 '오직 한 책의 사람'으로 70여 년 동안 성경만을 가르치면서 세계 신학교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최연소 교수와 최고령 교수라는 전대미문의 이름인 최장수 교수로 장신대를 일구어오셨습니다.

남의 책을 아무 가책도 없이 줄줄 읽는 교수들이 즐비한 강단에서 유일하게 원고 없이 성경책만을 들고 강의하셨지요.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유창하게 써 내려가며 강의하고, 성경구절과 수천 년 신구약의 역사와 교회사에 등장하는 이름과 연도를 막힘없이 언급하는 기억력은 너무나도 놀라웠습니다. 강의실에서 미처 따라가지 못한 제자들은 연구실로 찾아가서 질문을 드렸지요. 그럴 때마다 학장님은 항상 존댓말로 인자하게 대하시며 명필 휘호도 써주고 관련 서적까지 알려주면서 열정을 불어넣어 주셨지요. 그 사랑과 정성에 감동한 제자들이 총회장과 총장과 당회장이 되어 한국교회를 든든히 지키고 있습니다.

평양신학교와 고려신학교와 총회신학교와 장신대까지 격동기 때마다 흔들리던 신학교에 몸담으면서 교본을 직접 써서 밤새 철필로 가리방에 긁고 등사기에 밀어 '타마귀' 냄새나는 교재로 후학을 가르치신 덕분에 한국을 대표하는 최초 헬라어교본의 대명사가 되어 38개의 교단을 초월하여 모든 목회자의 영원한 스승이십니다. 지금도 신학교를 찾는 신입생들이 희랍어 교본을 가지고 오라고 하면, 히브리어 문법책을 가져오는 웃지 못 할 일이 종종 생깁니다. 몇 년 전에 헬라어 문법책의 오탈자를 전면 보완하여 개정증보판을 만들어 드렸을 때 무척 좋아하면서 서문을 추가하여 부끄러운 제자를 사랑으로 격려해주셨지요. 그 보다 훨씬 전에 신대원 졸업 학기에 학장실로 불러 신약성서신학자가 되라고 꿈을 불어넣어 주면서 직접 써주신 '하나님의 祝福(축복)이 永遠(영원)히 머무소서'란 휘호는 어느덧 가보가 되었습니다. 4년 전에 장신대에 이미 약속된 가을학기 강좌마저 사양하시고 급하게 떠나시기 직전에 93세에 직접 써주신 명필 휘호가 스승님의 마지막 선물인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공부하다가 죽는 것도 순교다'라고 즐겨 쓰신 휘호가 마음에 살아있습니다.

교회에 하나님의 생생한 음성을 전하려는 일념으로 새번역성경을 내셨지만, 인자를 '사람의 아들'로 번역한 것을 뜻밖에 문제 삼자 장신대의 평화와 교단의 안위를 지켜주기 위하여 교수직을 내려놓고 인도네시아 선교지를 개척하셨지요. 그 낯설고 무더운 오지인 이슬람 땅에서 얼마나 외롭고 힘드셨습니까? 3년 후에 다시 장신대로 복귀할 때 학장님의 손에는 손수 인도네시아어로 번역된 성경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 짧은 기간에 현지어를 익히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인도네시아 성경을 번역하는 일을 하셨습니까? 원주민성경에도 인자가 사람의 아들로 번역되어 있는데, 왜 우리말성경에서는 사람의 아들로 번역되면 안 되나요?

한국교회와 교단총회와 장신대를 염려하면서 눈물로 쓴 자서전을 끝내 출간하지 못하고 눈을 감으신 아, 박 학장님! 여러 가지 일에 연루된 사람과 후손이 아직 살아있다고 그 모든 상처를 항상 가슴에 품고 지내다가 홀연히 가신 스승님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4대가 목회자인 기독교 명문가로 손주 박범이 신학교에 입학하고 유학을 가고 목사안수를 받을 때, 그토록 좋아하며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한데 그 미소를 천국에 가서야 보나요?

사모님의 수고와 희생을 위로하려고 나팔을 부셨다는 학장님! 아차산에 울려 퍼진 그 나팔 소리가 저에게는 예수님의 재림을 알리는 천사장의 외침인 듯 옷깃을 여민 적이 많았습니다. 영락교회 중등부 시절 하계수련회로 광나루에 며칠 머물 때, 유치원을 운영하시던 사모님과 함께 등을 토닥이며 따뜻하게 맞이하신 그 설렘을 아직도 기억하는 제자 소기천 올립니다. (2020년 11월 20일)

소기천(전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한국교회정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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