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남궁혁 박사의 교회연합사업
남궁혁은 1911년에 주일학교위원회를 발족하여 13인의 실행위원 중 한명으로 활동하였는데, 이것이 훗날에 평양신학교의 교우지인 『신학지남』의 편집장을 맡아서 한국 신학발전에 기여하는 촉매역할을 감당하기에 이르렀다. 그 외에서 그는 『종교교육』의 필진과 『반도지광』의 편집인을 맡기도 하였다.
만일 남궁혁이 없었다면 오늘 한국교회가 교단을 초월하여 널리 사용하고 있는 개역성경을 과연 손에 쥘 수 있었을까? 남궁혁은 한국인 최초의 미국 유학파 신학자로서 성서번역 사업을 초교파적으로 추진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이루었다. 1926년에 발족한 신약 개혁자 회의에서 그는 레이놀즈, 케이블, 엥겔, 베어드, 하디, 피터스, 김관식, 김인준 등과 함께 개역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30년에 남장로교의 크레인과 함께 공인역(개역)성서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당시에 한국 언어의 변화, 고고학, 문헌학 등 주변 학문의 발달로 성서의 해석과 의미를 새롭게 조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1931년에 그는 3개년 전진운동(성경 읽기, 복음전도, 기독교문서 출판과 독서증가운동)을 성서공회와 협조하여 추진하기 위하여 저다인과 더불어 개역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저다인은 개인 사정으로 활동에 참여하지 못함으로써 남궁혁 혼자서 요한복음을 개역으로는 최초로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당시 조선어학회의 한글 반포 487돌을 맞아 한글맞춤법 통일안에 맞추어서 발표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당시 조선어학회는 성경이 “신철자법에 의하여 출판되기를 바란다”는 공한을 성서공회에 발송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서 1934년 3월에 그는 성서위원회에서 김관식, 채필근, 클라크, 밀러 등과 함께 개정철자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 해 가을에 그는 장로회 23회 총회에서 신약전서를 신철자화 할 것을 청원하여 가결을 받아내었다. 그 결과로 1937년에 그는 신약전서 개역을 끝냈고 이듬해 성경젼서가 발행 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공인성서이다. 이것은 1950년에 새 철자법에 따라 개정되어, 1952년 재판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5회 총회는 1948년 6월 서울 남산에서 개교한 장로회신학교를 평양의 신학교육을 계승한 학교로 인준하였고 제6대 교장에 박형룡 박사가 취임하였다. 그러나 그 때에 장로회신학교의 교장 직은 사실상 남궁혁에게 먼저 청원되었으나, 그는 “내가 한국교회의 분열을 책임질만한 인물이 되지 못하니 사양합니다.”라고 고사한 것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누구나 명예로운 자리에 앉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할만하다. 그러나 그는 당시에 분열과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신상의 유익만을 구하는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의연히 고결한 인품을 지킴으로서 후세에 큰 귀감이 되었다. 그 후에 그는 분열하는 한국 장로교회를 하나로 만들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신학교가 한 학교가 되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그 결과 그는 1949년 4월에 장로회신학교와 조선신학교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 이대영, 배은희, 윤하영, 이창규, 안두화, 인톤 등과 함께 합동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어간에 그는 부활절 연합예배를 주관하면서 한국교회의 지도자로 일치와 연합을 이루어 내었다.
곧이어 발발한 6.25전쟁은 평화의 상징으로 한국교회에 우뚝 선 남궁혁을 시기한 것일까? 공산군에 납치된 그는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고희에 가까운 고령에도 불구하고 금식기도를 하는 중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순교를 예감하여선지, 김일성의 지령이 있었는지 어느 날 중곡동 인근 채석장에 끌려가서 안타깝게도 북한 인민군에 의해 총살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의 최후 순교지는 지금의 용마 공원이 아닌가 추정된다. 한국전쟁에 순교한 목회자들이 많은데, 한국인 제1호 신학박사이며 신약학자인 남궁혁이 평양신학교 출신 학자로서는 유일하게 순교한 분이라고 여겨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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