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7일 방한한 기시다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날로 고도화하는 북핵 위협에 공조키로 하는 등 양국 간의 주요 현안을 논의했다. 기시다 일 총리의 이번 방한은 지난 3월 16일 윤 대통령의 일본 방문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단절됐던 한·일 정상 간의 ‘셔틀 외교’가 비로소 복원됐다는 의미가 있다.
한·일 양국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북한 미사일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기 위한 협력과 관련 논의를 진행하기로 했다. 이는 윤 대통령과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발표한 ‘워싱턴 선언’의 핵심인 북한의 핵 억제력 강화에 일본에도 참여의 길을 열어놓은 것으로 향후 한·미·일의 긴밀한 북핵 대응을 시사해 준다.
이번 회담에서 눈에 띄는 건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수 방류와 관련해 한국 전문가의 현장 시찰단 파견을 일본이 수용한 것이다. 한일 정상회담 후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윤 대통령은 후쿠시마 원장 오염수 방류 문제와 관련해 “과학에 기반한 객관적 검증이 이뤄져야 한다는 국민적 요구”를 거론했고 이어 기시다 총리는 “한국민의 불안에 답하는 노력을 지속하겠다”고 화답했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에 대한 검증을 허용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일본은 오는 6월 최종보고서를 내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외에 다른 나라에는 현장 검증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는 두 나라 사이에 신뢰 관계가 어느 정도 회복됐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이번 기시다 일본 총리의 답방에 국내의 이목이 집중된 이유는 따로 있다. 두 나라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과거사 문제에 일본이 어떤 해법을 내놓을지에 정치권과 언론이 촉각을 세웠다.
윤 대통령으 지난 3월 일본 방문에 앞서 강제징용 배상 문제에 대한 선제적 결단을 내렸다.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첫걸음이었지만 국내 여론은 나빠졌다. 그래서 더욱 이번엔 일본이 그에 상응하는 해법을 가져오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기시다 총리는 공동 기자회견에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해 언급하며 “당시 혹독한 환경 속에서 일하게 된 많은 분들이 힘들고 슬픈 경험을 하신 데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역대 일본 내각의 역사 인식을 계승한다는 입장에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했다.
기시다 일 총리의 이런 발언은 지난 3월 윤 대통령 방일 때 그가 1998년 한일 공동성명, 즉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상기하는 수준의 우회적 언급을 했던 것과 비교하면 분명 진전된 변화다. 이번에도 직접적인 반성과 사과 표명 없이 개인 입장을 전제로 했지만, 일본 총리로서 과거사 문제에 유감을 표했다는 건 이전과는 다른 자세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 총리의 유감 표명은 우리 국민이 듣고 싶었던 어조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사죄’와 ‘반성’이라는 솔직담백한 표현 대신, 역대 내각의 인식 계승을 언급하는데 그친 건 한일 과거사 문제에 관한 한 아직 두 나라 사이에 멀고도 먼 인식의 차이가 있음을 깨닫게 한다.
솔직히 말해 한일 관계가 신뢰를 회복하는 과정에 들어서게 된 건 양국의 미래를 위한 윤 대통령의 결단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했다. 정치적 계산을 앞세웠다면 지지율 하락 등 날로 악화하는 여론을 무릅쓰고 이런 해법을 내놓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이 먼저 일본의 손을 잡은 건 우리가 먼저 결단하지 않으면 상대의 변화를 끌어내기 어렵다고 봤기 때문이다. 날로 커지는 북핵 위협에 한·미·일 공조가 절실한 상황에서 언제까지 과거에 발목 잡힐 수 없다는 우리 정부의 결단이 두 나라 관계 회복의 기점이 된 만큼 이번엔 일본의 대승적 결단이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기시다 총리의 과거보다 진전된 유감 표명은 즉흥적으로 나왔다고 볼 수 없다. 나름 한국 정부를 배려한 측면이 있다. 다만 한일간의 과거사 문제는 사과와 반성, 용서와 화해라는 근본적인 해법을 놔두고 다른 길을 찾으려 할수록 더 복잡해지고 결국은 도돌이표가 된다는 걸 알았으면 한다. 그건 일본 정부도 원치 않을 것이다.
두 나라 사이를 옥죄고 있는 과거사 문제가 표면화될 때마다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일본의 진솔한 사죄의 말 한마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다. 그런데 일본의 과거사 사죄는 이미 역대 일본 총리와 일왕을 통해 이미 수십 차례나 했다. 대통령실이 “사과를 한 번 더 받는 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라고 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그런데도 우리 국민의 정서가 일본의 사죄가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끼는 건 반성하는 이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백 마디 말보다 한가지 실천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사죄가 진정성이 있으려면 말이 행동으로 드러나야 하는데 사죄하고 곧바로 망언을 쏟아내는 일본에 마음을 열 국민이 누가 있겠나.
‘첫술에 배부르지 않다’라는 말처럼 한·일 두 나라가 가야 할 길은 아직 멀어 보인다. 양국이 관계 회복의 첫 단추를 꼈지만 오랜 불신의 벽이 다 허물어진 건 아니라는 말이다. 일본은 한국 정부의 결단에 비해 일본의 호응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왜 일본 언론도 하고 있는지부터 살피기 바란다. 그래야 과거를 털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